내기 (w. 아리)
“언니! 웬일이야?”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둑했다. 우중충한 하늘은 곧 비가 내릴 듯했지만 다행히 빗방울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하필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던 날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마주친 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에 입매가 올라갔다. 오빠 집에 있을 텐데 들어가서 기다리지. 어쩐지 조금 기뻐 보이기까지 하는 음성이었다. 그런 저와 달리 집안으로 들어오기까지 제 언니의 표정엔 어떠한 것도 서려있지 않았다. 어딘가 어두워 보이기도 했기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지사였다.
조용한 집안. 잠깐 어디 나간 건가. 비올텐데 우산은 챙겨갔으려나. 그 짧은 찰나에 수가지의 생각이 스쳐갔다. 좀 있다가 톡이라도 보내봐야지. 그렇게 정리하며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둔 후 유리잔에 물을 따르면서 곁눈질로 언니의 표정을 살폈다. 언니는 여전히 현관 쪽에 선 채 말없이 거실 창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너무나 평이하기 그지없어 나는 순간적으로 나의 인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 떠났어.”
잠시간의 침묵이 차가운 공기 위로 떠오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정적을 깨뜨리는 건 여전히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독백과 비슷한 형태를 띄우는 제 물음이다.
“말 그대로야. 이젠 안 온…….”
심드렁한 음성의 끝을 맺는 건 귀를 찢을 듯한 강렬한 파열음이다. 수초 후, 뜨거운 액체가 붉은색으로 목 언저리를 물들이면 별 박힌 듯한 두 눈에 경악에 가까운 공포가 서린다.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 유리잔이 그런 그녀의 뒤로 나뒹군다. 언제. 어디서. 침착하려 애쓰지만 먹은 것도 없이 게워낼 것처럼 울렁이는 속은 끝내 떨리는 목소리로 토해진다. 엉망인 질문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까와 달리 한껏 움츠러든 채 더듬대는 대답이 그녀로부터 흘러나오면 곧장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다. 등 뒤로 다급한 언니의 음성이 저를 잡아 세우는 듯했지만 망설임 없이 그 만류를 뿌리친다.
수십 통이 넘는 전화 연결음 뒤엔 익숙한 안내 음성만이 들려왔으며 제 아무리 카톡과 문자를 보내도 숫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언니가 말했던 카페에 제가 찾던 사람은 없었다. 인상착의를 설명하자 이제 막 퇴근 시간인 참인지 카운터에서 앞치마를 벗던 사내가 제가 찾던 사람이 나간 방향을 알려주었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 실마리인 셈이었다. 카페를 나선 뒤 한 시간 정도 이 근방 곳곳을 뒤져 보았지만 그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리고선 택시를 타고 돌아다니며 언젠가 그가 저를 데려갔던 식당도 술집도 전부 가보았지만 의미 있는 대답은 듣지 못했다. 어느덧 하늘이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이고 제 콧잔등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 뒤에야 나는 시간의 흐름을 자각했다. 그제야 느껴지는 하단의 아픔에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신발을 벗으니 신발 밑창과 양말이 붉은색으로 짙게 물든 채였다. 집에서 나오면서 유리 파편을 밟았던 모양이다. 아까 언니가 소리쳤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신발을 구겨 신자 아릿하게 퍼지는 통증에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점차 거세졌다.
지금 집에 돌아가야 내일 학교도 가겠지. 저녁까지 조원한테 전달해야 하는 자료가 있었는데. 오늘 수업 정리도 했어야 했는데. 그 교수님 건 한 번 미루면 피곤해지는데. 아, 내일 오전 수업에 발표도 있지. 피곤한 것인지 무거운 머리 안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배속을 뒤로 감아놓은 듯 느리기만 했다. 제 머리를 세차게 두드리는 빗소리가 생각 사이를 비집고 드는 공백을 메꿔서 다행이라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도착한 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파트 세대 대부분의 불빛이 꺼져있던 시간이었다. 익숙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 낯선 풍경이 시야를 메웠다. 젖은 머리칼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며 깔끔한 현관 바닥을 더럽혔지만 개의치 않고 신발을 벗었다. 늘 있던 그 사람 대신 저를 보고 놀란 토끼눈을 한 채 그 자리에 붙박듯 얼어있는 여인. 다른 것들은 변한 것 없이 모두 온전히 같은 색, 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는데. 고작 단 하나의 파츠가 바뀐 것뿐인데도 도저히 눈감아 줄 수 없는 거슬림이었다. 이질감으로 향하는 길에 붉은 발자국이 선명히 찍혔다.
그녀의 바로 앞에 서서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가까이서 보니 꽤 깊게 베였던 것인지 언니의 목에 붙여진 밴드 안쪽에 핏자국이 가득하다. 언제나 발그스름하던 색으로 물들어 있던 낯빛은 창백하게 질린 채다. 느릿하게 뻗어진 손이 그 목 위로 오르면 늘 서려있던 온기와 달리 젖은 손끝의 차가운 감촉에 놀란 여인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이렇게 감당도 못할 거면서. 불편한 정적이 꽤 오래 이어지면 부드럽게 그녀를 쓰다듬는다.
“무슨 생각이었어?”
그 손길과 달리 뱉어진 음성은 한없이 메말라있어 지금 제 꼴과 대조를 이룬 채다. 희미한 조명등만이 켜져 있던 탓일까 탁한 푸른빛 안으로 그녀의 모습이 비치면 점차 엄지에 힘을 싣는다. 여인의 잇새로 미약한 침음이 흘러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가락으로 짓누른 밴드 아래로 핏물이 고인다. 뻣뻣하게 굳은 채 떨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여인이 주춤대며 한 발 물러나며 이젠 낯설기까지 한 제 이름을 조심스레 입에 올린다.
“저, 아야…….”
“언니.”
두려움이 깃든 애절한 부름을 단칼에 잘라낸다. 평소의 다정함이라곤 조금도 서리지 않은 음색은 대상을 질책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 그저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고 그래. 어제. 아니, 오늘 아침까지도 그 사람에게서 별다른 동태는 느끼지 못했다. 표정으로 속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니 심경에 변화가 있었다면 제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그 사람의 잠적이 그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돈 유추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조막만 한 머리에서 나온 한심한 생각으로 인한 것인지, 평소엔 볼 일 없던 언니로서의 책임과 걱정으로 기인된 부탁 때문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시답잖은 그 방송이라도 계속해야 할 거 아냐.”
반창고 위로 닿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면 고였던 샘물에 길이 나듯 가늘게 새는 줄기가 빨갛다. 상처를 압박하는 손길이 거친 탓에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여인의 두 눈에 더욱 깊은 불안이 서린다. 그럼에도 환부에 더욱 실리는 무게감이 겁박이라도 하는 듯하다. 커다란 천둥소리와 함께 온하늘이 일순 점멸하면 끝없이 침전한 두 눈 안으로 여인이 담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여인이 해저에 다다를 수 없는 건 그 깊이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수심이기 때문이리라. 여인을 향한 그 집요함은 좀처럼 사그라들 줄 모른다. 헤엄을 치지 못하는 사람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감각이 움직일 수도 없게 발을 붙들어 매었으나. 그곳에서 나오려 입술 달싹이는 모양새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아가미만 꿈뻑대는 듯 모순적인 작태를 지닌 채다. 어찌할 도리없이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게워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던 무렵,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달싹인다.
“다시 내 눈 앞에 갖다 놔.”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줄기가 거셌음에도 나직한 소리는 묻히지 않은 채 고요히 여인을 향한다. 어둠 속에서도 끈질기게 상대를 쫓는 시선 어둑하게 빛난다. 당장. 덧붙이는 소리는 희미하고 무던했으나 목뼈 위 차가운 손길이 닿은 곳이 타는 듯 뜨거웠으니 모른 척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인의 목울대가 울리며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꼴사납게도 선연하다. 여인이 바르르 떨며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강압적인 손길을 거두며 뺨을 도담이는 행태가 부드럽다. 그럼에도 물기를 뒤집어쓴 그 낯은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으니 여인의 시선이 끝내 아래로 툭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