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

사랑上

온점001 2024. 6. 16. 06:14

 
 

 
 한 시간 동안 잡힌 체 당겨지던 양갈래 탓에 두피가 살짝 얼얼했다. 호텔의 거울 앞에 앉아 거의 다 풀어진 머리를 몇 번 만지더니 대충 올려 묶는 듯 보였음에도 깔끔하게 정돈됐다. 곧 잘 건데 그냥 풀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거울 속 제 몸 곳곳에 새겨진 흔적들이 잠깐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었었던가. 자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붉은 반점들과 잇자국 그리고 크고 작은 멍자국들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며칠 된 것들이 이제 차차 사라지고 있었으나 어제오늘 수놓은 그것들은 보다 선명하게 번져갔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이는 부분은 아니었기에 금방 눈을 돌렸더란다.
 
 “오랜만인데도 너랑 하는 건 역시 존나 좋단 말이지.”
 
 거울 안에서 시선을 돌려 그의 모습을 힐끗 바라봤다. 아무런 감흥 없는 그 말에 웃음조차 짓지 않고 그저 무반응으로 대꾸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어갔다.
 
 “아리쨩은 뭐든 맞춰주니까 편해.”
 
 그 말 한마디에 제 모든 행동이 일순 멈췄다. 아주 찰나였지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상당히 익숙한 말이었음에도 정확히 왜 그러했는지, 그 말의 어떤 부분이 나를 깊게 찔렀는진 아직도 잘 모르겠다. 무언가에 기분이 상하거나 무언가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나는 스스로가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머리가 나쁜 나는 그럴 때마다 그저 상해버린 제 감정을 분출하거나 회피해버리곤 했다. 이번엔 후자였다. 왜 후자였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알 수 없었다. 내 삶은 무지와 회피의 연속이었으니. 한 번 더 하자.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것 대신에 어느새 제게 다가와 뒤에서 저를 끌어안으며 속삭이는 그를 뿌리치곤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입었다. 그에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가 나를 보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또 불안정한 여자의 정신 나간  변덕이라며 혀를 찰 것이 분명했으니.
 
 “집에 갈래.”
 “갑자기?”
 
 황당한 그를 뒤로한 채 옷을 완전히 챙겨 입고 가방까지 든 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의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기가 차다는 듯한 헛웃음과 자그마한 욕지기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지만 무미건조한 얼굴 그대로 방문을 닫고 걸음을 옮겼다.
 
 
 


 
 
 

 

https://youtu.be/oPMIMxZs75A

 

 

 
 
 
 
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럼에도 후회 대신 자리한 건 미련이다
 
 
 
 카펫에 스며들어 사라지던 높은 구두굽 소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부턴 호텔 로비 대리석 바닥을 부딪히며 일정한 소리를 낸다. 그마저도 곧 헤드셋에서 흘러나온 노래에 묻혀 사라지지만. FLO의 Walk Like This를 시작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랜덤으로 돌려두고 시간을 확인하면 이제 막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으나 귀찮으니 택시라도 타야지. 주소가 어떻게 되더라. 한국에 오면 호텔방에서 장기투숙을 하곤 했는데 며칠 전 묵는 곳을 옮겼기에 주소를 확인하려 휴대폰의 인터넷에 접속하고 어플로 택시까지 호출한다. 그러며 걷다 보니 노래는 거의 끝이 나고 나는 그제야 고개를 올려 앞을 본다. 호텔 입구 회전문을 걸어 나오면 이 시간까지 번잡한 도심 한복판이다. 큰길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더라. 주위를 살피던 시선이 굴러가며 수평을 그리면 느릿하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선다.
 오늘 무슨 날인가. 기분이야 그 일이 있던 이후인 열흘 내내 좋지 않았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되는 일이 없는 듯한 기분이다. 그냥 무시하고 빨리 가버려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한참 익숙한 인영을 멍하니 응시한다. 길 건너편 서점 앞에서 옆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수많은 인파 속에서 너를 찾는 건 이렇게나 간단한 일이구나.
 
 “……백지헌.”
 
 반사적으로 조그맣게 네 이름을 읊조린다. 너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랑에 빠진 너를 발견하고 그런 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러지 말아 달라고, 나를 봐달라는 말을 사랑한다는 단순한 고백으로 돌려 애걸했던 후로부터 열흘 째. 나는 그 이후로 너와 연락을 하던 개인용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고 방송조차 켜지 않았다. 거처를 옮긴 이유도 그러한 행동의 연장선인 셈이다. 그렇게 열심히 너를 피해왔는데 그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된다. 오랜만에 보는 네 얼굴을 보는 순간에조차 그제야 뛰는 맥박이 느껴지는 제 자신이 한심했으나 그 낯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네가 좋아서라는 단순한 이유가 첫 번째이고, 다음으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편안한 미소가 두 번째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그런 얼굴을 하는구나. 저릿하다 못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을 옥죄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간신히 시선을 굴린다.
 네 옆에 있는 낯익은 얼굴. 저와 한참 다른,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은 확실히 미인이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검은색 머리칼은 윤기가 흐르고 그와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에 발그스름한 두 볼. 무엇보다도 온정을 가득 머금은 두 눈이 다정하게 휘며 입가를 살짝 가린 채 부끄러운 듯 웃으면 오롯이 애정으로만 이뤄진 존재인 양 보였다. 그래, 저런 애가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사람인 거겠지. 결국 이런 위치인 나와는 다르게. 제 이미지나 됨됨이가 어떤지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누군가의 최애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함께 하고 싶은 한 사람이 될 수 없단 걸 안다. 그래, 만들어진 부분이 아닌 나는 스스로도 좋아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 타이밍이 끝내주게도 헤드셋에서는 새로운 노래가 재생된다. 그게 또 하필이면 Peach PRC의 Heavy라 그것이 저조된 기분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여전히 굳어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것이 일 분 정도 지속된 뒤에야 나는 거칠게 헤드셋을 벗어버린다. 그탓에 잠시 네게서 떨어졌던 시선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가면 그 순간 너와 눈이 마주친다.
 곧 횡단보도의 불이 초록불로 바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나듯 뒤돌아 뛰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이렇게 도망치듯 구는 것인지는 이 역시 알 수 없는 현상이다. 나는 그저 딱 맞게 도착한 택시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뛰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물을 먹은 듯 웅웅대는 귓가에는 어떠한 것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그마저도 제 무의식이 만들어낸 착각일 확률이 높았으니, 그저 입술을 깨문 채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택시에 오른 지금에도 바깥을 바라보지 않는다. 네가 쫓아오면 제 미련을 버리지 못할까봐 라는 흔한 드라마 같은 이유가 아니다. 네가 저를 잡으러 오지 않을 것이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을 정말로 현실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머저리 같은 이유다.
 뒷좌석에 앉아 거친 숨을 고르며 아래로 시선을 고정하자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택시가 출발하기 직전, 택시의 창문을 내리고 그것을 바깥으로 거세게 집어던지곤 다시 유리를 올린다. 그것이 어디로 튕겨 날아가는지도 바라보지도 았았기에 앞으로 영영 찾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조수석 뒤에 이마를 기댄다. 그렇게 수초 간 있다 보면 맥박이 안정을 찾고 멍하기만 하던 귀에 익숙한 노래 가사가 들려온다. Natalie Jane의 Intrusive thoughts. 차라리 노래를 잘 알지 못했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바닥을 칠 일도 없었을까. 노래를 그만두던가 해야지. 늘 그렇듯 극단적인 생각을 하다 보면 자각하지 못했던 눈물 한 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코끝에 방울지더니 그대로 툭 떨어진다. 깔끔하던 택시 카펫 위로 점점이 진한 방울 자국들이 늘어나면 어느새 윗니로 입술을 꽉 깨물고 흐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 해서 이렇게 아팠던 적은 없는데. 원하지 않던 헤어짐으로 짙은 공허를 느끼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든 경험이야 수차례 해보았던 것이라 익숙하다. 하지만 그 어떠한 이별에도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었기에 느껴지는 통증이 한없이 낯설다.
 
 “아가씨, 괜찮아요?”
 
 좌석에 이마를 붙이고 끅끅대는 울음만을 뱉는 제가 사뭇 걱정스러웠던 모양인지 기사님이 결국 제게 물어왔지만 난 어떠한 대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코를 훌쩍이며 떨리는 호흡을 불안정하게 입 밖으로 뱉을 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 거지 같은 노래라도 꺼주지 않으시겠냐는 물음이라도 던졌을 텐데. 몸에 힘이 완전히 다 빠져버린 듯한 감각에 어떠한 반응도 보일 수 없어 그저 숨을 쉬는 행동을 유지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에. 그렇게 수분이 지나고서야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기사님, 차 좀 돌려주세요.”
 
 집까지 기어 올라갈 순 있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잔뜩 잠긴 목소리를 뱉었더란다.
 
 
 
 


 
 
 
 
 이곳에 온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 방까지 거의 도착했다가 차를 돌린 것이라 이미 열 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민폐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그럼에도 언제나 그렇듯 나는 제가 우선인지라 택시에서 내려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언젠가 뒤에서 몰래 훔쳐봤던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낯익은 층수를 누르고 내린다. 그 모든 일련의 동작을 하는 동안에도 방금 전 봤던 네 미소가, 그리고 옆자리에 있던 여인의 웃음이 잊히지를 않아 자각 없이 손목을 긁는다.
 이 시간이면 그 자식은 대체로 없다고 했는데. 부디 그 자식의 부재를 기도하며 초인종을 누르고 몇 초 기다리면 이윽고 문이 열리고 신은 역시 없다는 걸 또 한 번 느낀다. 아무리 불신자라 하더라도 이런 날엔 좀 도와줘도 되지 않나. 예전보다 한층 차가워진 사내의 눈빛은 저를 경계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그것에 새삼 위축되진 않는다. 다만 저 역시 그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누구 왔어? 이 시간에 누구야?”
 
 낯익은 목소리가 집안에서 들려오면 그래도 그것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아무리 꼬여버린 사건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음성을 들으면 뭐든지 대충 수습되곤 했으니 이건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맥락이다. 사내는 그 목소리 주인의 시야에서 저를 지우려 몸을 비키지 않았으나 저는 그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반성도 없이 입을 연다. 지금 그렇게까지 하기엔 너무 지쳐있으니까 네가 좀 봐달라는 생각만 멋대로 하고선 말이다.
 
 “아야.”
 
 피로에 잔뜩 절은 한 마디가 짤막하게 나오면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사내를 제치고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은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으나 오래 연락이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한 번 제멋대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에 당황한 것인지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두 팔을 살짝 올린 채 저를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향기가 낯선 것들에 오염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마구 비비적대며 어리광을 부리듯 굴었다. 언젠가 한 때로 돌아간 것처럼. 그녀도 거리낌 없이 언제나 그랬듯 저를 안아줬으면 그래도 거지 같던 하루 끝에 더할 나위 없는 안도감을 느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그녀는 그러는 대신 난처하게 웃으며 뒤에 있는 사내의 눈치를 살폈으니.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면 빛 꺼진 눈 안에 그녀가 담기고, 그녀의 눈 안에 제 모습은 없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시선을 옮겨 사내를 향해 입을 연다.
 
 “……오늘만 빌려줘.”
 
 제 안의 어떤 형체 하나가 무너짐을 느꼈다. 이는 사내를 향한 인정인 동시에 패배를 향한 시인이었으며, 부서질 것 같은 현실에 어떻게든 버텨보려 찰나의 안정에 기대어 살아보기 위해 동정을 구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