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

진심

온점001 2024. 7. 2. 02:44

 

 

 수술 경과는 좋은 편이었고 마취만 풀리면 의식이 돌아올 것이라 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친언니라고 병상 옆을 내내 지키던 아현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이었다. 그녀를 내내 따라다니던 그림자의 사내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뒤를 따랐더란다. 덕분에 병실에 혼자 남겨진 지헌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을 뺐다. 간이 의자에 앉아 깊은 숨을 내쉬니 그제야 주변의 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이름 모를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가 1인실의 적막감을 채웠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비가 오고 있었구나. 정신이 없어서 그조차 이제야 자각했다는 것처럼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슬슬 해가 뜰 텐데 비가 와서 그런가 하늘이 어두워 시간 감각이 흐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빗소리 중간마다 기척을 내는 고른 숨소리가 문득 선명해져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눈을 감고 누워있는 사람. 그녀의 목에 붙은 커다란 드레싱 거즈만이 이 평화로운 적막이 거짓됨을 알려주는 듯했다. 수술 시간이 짧지 않았던 만큼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충분했기에 다시금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제 의지와 관계없이 이따금씩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가면 아직도 코끝에 남은 혈향이 선명한 듯해 울렁일 뻔한 속을 가까스로 다잡아냈다.

 언제쯤 깨려나. 그러한 경험을 안겨준 장본인이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평소에는 잘 자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들지도 못하는 주제에. 수술이 끝난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좀처럼 깰 생각을 않는 그녀의 모습에 답지 않게 조급해지려던 참이었다.

 

 “아……!”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감겨있던 눈꺼풀이 잘게 움찔였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간이 의자가 조금 떨어진 곳으로 바퀴를 굴러 멀어졌다.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두 눈이 뜨이는 순간. 앞에 있는 인영을 인지하지도 못한 듯 조금 멍해 보이는 시선 안에 그가 담겼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뜨인 반틈으로 보이는 푸른 두 눈에 그의 상이 온전해질 무렵 흐림이 가시고 반짝이는 맑음이 들어서던 찰나, 그 시선이 흔들렸다. 그 자그마한 머리통으로 무엇을 더듬고 있는 것인지.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니 그녀의 눈에 실린 애수의 깊이 역시 그로선 셀 길이 없었다. 짙은 근심을 실은 채로도 마지막까지 그를 담으려 애쓰는 것만 같던 시선이 끝내 그를 저버렸음에도 그는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괜찮아? 불편한 곳은 없어?”

 

 그는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그리고 해줄 수 있는 것을 해낼 뿐이었다. 평소처럼 담담하려 애쓰며 차분하게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나아가 미동조차 않았다. 그를 담지 않은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면 어느 때보다도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허공만을 담았기에 그곳에 그녀의 생각이 고스란히 비쳤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분명 후회하고 있었고 비통에 잠긴 채였다. 그의 가치관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괴로움의 기저는 분명 그에게 저질렀던 만행 탓이 아닌 눈을 뜨게 된 현실에 있으리라. 이기적이고 한 치의 앞도 내다보지도 못하며 한 수 더 나아간 생각이라곤 조금도 하지 못하는 치. 동시에 그것을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아서 어떻게든 살고 싶어 발버둥 치나 늘 그릇된 선택만을 번복하는 주제에 그로 인한 고통을 스스로 짊어질 깜냥도 없는 못난 이. 그것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제가 눈을 뜬 지도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 말인즉슨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방송을 쉰다는 갑작스러운 공지를 남기고 잠적한 지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목을 긋고 난동을 부렸던 것도 벌써 한 주 전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배경만 병원으로 바뀌었을 뿐 전과 똑같다. 더 지루해진 일상이었지만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그래도 재미있는 것이 하나 생겼다는 것 정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저를 찾아오는 제 동생과 그 뒤로 따라오는 한 녀석. 후자의 경우엔 아파서 입원한 곳에서까지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따금씩 보이는 못마땅하고 탐탁지 않아 보이는 낯이 꽤 볼만해서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감상이 들었다. 나는 그에 보란 듯이 동생에게 부러 무리한 부탁을 하곤 했는데 병상에 앉은 제 모습에 약해진 탓일까. 그것을 곤란해하면서도 대부분 들어주는 동생의 모습에 승리의 미소를 비열하게 지어 보이면 녀석은 열받은 낯을 보였더란다. 그리곤 이제 멀쩡해 보이는데 냅두고 집에나 가자며 동생을 재촉하곤 했다.

 오늘도 그렇게 녀석을 간접적으로나마 잔뜩 긁어대고 있던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아니, 그랬어야 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던 걸까.

 

 “언니, 많이 호전됐으니까 이제 저녁엔 집으로 돌아가려고. 언니도 다 큰 어른이니까 밤에 혼자 있을 수 있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던 동생은 가볍게 웃고 있었다. 할 일이 밀렸다는 핑계를 댔지만 아무리 바보인 저라고 해도 그것이 변명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미소 지은 채 손을 흔드는 동생이 제게는 시종일관 무덤덤한 낯을 보이던 그 녀석과 이곳을 떠나는 걸 바라볼 수밖에.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상황인 셈이다.

 혼자 밤을 보낸 지 이틀 차가 되던 오늘. 일주일 내내 등교 전 혹은 하교 후에 반드시 제 병실을 들리던 사내가 지금 제 옆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다. 제 동생과 마주치는 것이 껄끄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제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개인 사정이 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언제나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가던 그였다. 그럼에도 오늘은 밤엔 아홉 시가 넘은 시각까지 제 옆을 지키고 있으니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둘 사이를 감도는 어색한 침묵 탓에 그러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자꾸만 곁눈이 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늘 쉼 없이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던지곤 했던 그였기에 이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목은 괜찮냐던가 먹고 싶은 건 없냐던가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아주 드물게 제가 입힌 손의 부상에 대한 경과나 학교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아주 평범하게. 그 모습이 나를 깊게 찌르다 못해 또 한 번 죽이는 꼴인지도 모른 채. 내가 어떤 대답조차 하지 않아도 그는 꾸준히 저를 찾았고 끝없이 말을 붙였다. 끈질기다고 할 정도로. 곧 죽어도 저는 안 된다는 걸 자기가 알려줬음에도 이제와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제 짧은 식견으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https://youtu.be/5IUOzNticSE

 

 

 

 

 

 

 

 

 

 

유일한 나의 신을 위한 것이라면

일방적인 마음이라 한들 오롯한 진심이다

 

 

 

 “그때 그 말, 아직도 유효해?”

 

 저도 모르게 너를 향해 온전히 고개를 향한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과 의문을 던지는 의도가 표정 위로 선연하게 드러난 탓일까 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금 입을 연다.

 

 “좋아한다고 했던 말.”

 

 원래 생각의 정리가 느린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사고가 고장난 듯 잠시 모든 행동을 멈춘다. 멍하니 벌어진 입하며 흐름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멍청한 얼굴이 그 증빙인 셈이다.

 

 “이젠 네 그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하니까…… 그때 착각이라고 했던 거 사과할게.”

 

 틀린 것이 있다면 바로잡는 성정은 지금 상황에서까지 여전하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왜 문득 처음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를 떠올렸을까. 그에 대한 의문이 들어왔지만 그것은 곧 어렵지 않게 풀려버린다. 탁한 제 눈과 달리 올곧고 침착하게 저를 직시하는 황동색 눈동자가 그때와 같았으니까.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감정들은 애써 누르고 있음을 증명하듯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조차도. 긴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선 어떠한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꿈결의 끝에서 현실로 돌아와 처음 마주한 네 모습은 아직도 선연하기만 하다. 낯익은 음성이 흐린 의식에나마 비집고 들어오고 네 두 눈이 선명해질 무렵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뻔도 했지만 그 순간 주마등처럼 스치는 기억의 조각들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제아무리 엉망인 데다 양심이 없는 저로서도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자각은 있었기에. 사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네게 저주로 남기조차 실패했다는 사실이 제게 있어선 더욱 큰 절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최악이네. 이 현실도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그런 생각이나 하는 나도.

 

 “네가 나와 그 여자의 관계를 어떻게 여기는진 모르겠지만.”

 

 실타래가 엉키던 시발점. 그 언급에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그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는데. 내가 설령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더라도. 신중하고 느릿하게 덧붙는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도망치듯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심장 한 편이 욱신대는 감각이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낯설기만 해서 입술 끝만 잘근 깨문다. 듣고 싶지 않아. 듣기 싫어. 차마 나오지 않는 음성이 목울대를 치듯 울려대는 듯한데 끝내 나오지 않는 건 아마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 탓일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너와 함께 일하는 게 더 즐거워.”

 

 이제 보니 우유부단 한 건 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그렇게 멋대로 성급한 판단을 내리며 꺼져가는 두 눈을 보다 아래로 내린다. 그래서 너는 어쩌고 싶다는 걸까. 머리 나쁜 저로선 예측할 방도가 없었기에 자꾸만 되감아 반복재생 되는 방금 전의 네 말만 곱씹고 있을 뿐이다. 저 구석으로 밀어 두고 싶은데 끝내 좋지 못한 것을 떨쳐내지 못하는 건 제 나쁜 습성이다. 사랑도 일도 잡고 싶다는 걸까. 넌 야망이 크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사람이니까 그 욕심이 과욕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음에도 괜히 원망스러워지는 건 저 역시 하나의 인격체라는 증빙인 동시에 제가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란 의미다. 그럼에도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저를 첫 번째로 두지 않는 취급 정도야 넌더리가 날 만큼 익숙하니. 불안정하고 미숙하며 제멋대로에 변덕스럽다. 시한폭탄 같은 저를 누구보다도 우선으로 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알고 있다. 그래, 지겨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고 그 어려운 일을 해내던 유일한 존재마저도 종국에는 제게서 손을 뗐으니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 먹은 것도 없는데 씁쓸한 맛이 혀끝에 감돌던 그때, 다시 한번 네가 입을 연다.

 

 “그러니 만약 사귄다고 하면 너겠지.”

 

 아주 느릿하게 굴러간 시선 끝에 네가 맺힌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개에 인지가 마비된다. 방금 뭐라고. 턱끝까지 스민 질문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란 망막에 네가 맺힌 채 미동이 없다. 그런 저와 달리 도망치고 싶어 흔들리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여전히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너는 더듬거리지만 그간 해왔던 생각을 꾹꾹 눌러 담은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사귀게 되면 난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랑 자고 다니는데 신경 쓰지 않을 호구는 못 돼. 그리고 난…… 애인으로는 그다지 재미없는 인간이고, 또…….”

 

 처음엔 분명 그러했는데 가면 갈수록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는 모습에조차 웃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너를 응시한다. 그런 제 모습에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아래로 떨궈버리곤 입을 꾹 다무는 네 모습도 그저 바라볼 뿐이다. 짧지 않은 정적이 둘 사이를 메꾸면 결국 그것을 깨뜨리는 건 이번에도 머뭇대는 네 음성이다.

 

 “그러니까 이젠 뭐라고 말 좀…….”

 “좋아해.”

 

 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처음으로 네게 뱉은 한 마디엔 너와 같은 절제라곤 조금도 서리지 않은 채다. 다른 여자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데, 저와 사귄다는 결정의 기저에 깔린 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처럼 가슴 가득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밀물처럼 차오른 한 마디를 뱉을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너를 담은 두 눈이 별무리를 끌어모은 듯 쉼 없이 반짝이고 살짝 벌어진 입술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자꾸만 달싹인다. 오랜 정적을 유지하던 제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네게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을까. 네 낯빛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지만 이제 와서 그것이 제게 영향이 있을 리 없기에.

 

 “하아……. 너 진짜…….”

 “좋아. 진짜. 정말로 좋아해, 지헌아. 너무너무.”

 

 맥이 풀린 듯 긴 숨을 뱉는 네 모습은 어쩐지 긴장이 풀린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빛내며 방금 네가 했던 조건과 일련의 말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양 제가 하고 싶은 말만 내뱉는 제 모습에 웃음기는 없었기에 퍽 진지해 보일지도.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진지하게 이러고 있다는 게 코미디라면 코미디였지만. 제 타입도 아니었으며 제 스타일도 아니었지만 사랑은 그런 걸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기에. 누군가가 네 어디가 좋냐고 묻는다면 수없이 꼽을 수 있었다. 머리가 좋고 영리하며 비전이 있고 자신의 삶을 아낄 줄 알고 싸가지가 없는 것도 생각보다 꽤 좋아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측은지심을 지녔고 옷도 잘 입고 노력할 줄 알고. 더 늘어놓기엔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하지만 단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화해하자, 아리야.”

 

 울지 않으려 했는데 그 호칭에 한 번, 그의 손에 올려진 익숙한 반지에 또 한 번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때 뒤따라왔구나. 너는 이미 진즉에 나를 택해주었던 걸까. 그런 생각에 코끝이 찡해지며 시선을 올리면 잔뜩 젖은 배경에 네 모습이 흐리다. 재수 없고 싹수없는 네가 가끔 보이는 이 애매한 다정함이 사무칠 정도로 좋아서. 울음을 삼키고 감정을 속이는 게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익숙한 저였음에도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아마 네가 내게 건네는 모든 것들이 진실됨을 알기 때문이리라. 평생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온 내게 너는 언제나 진심을 속삭였으니, 나는 이번에도 의심 한 치 없이 너를 믿어버린다. 이는 내가 네게 보이는 사랑임과 동시에 눈먼 숭배인 셈이다.

 나는 가까스로 눈물을 삼키며 끼워달라는 양 한쪽 손을 내밀었고 그에 너는 자연스레 반지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두려 한다.

 

 “그쪽 말고.”

 

 짤막한 한 마디에 반지를 검지로 가져가던 너는 의아한 낯으로 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듯 픽 웃더니 이내 제 약지에 그 반지를 가져갔다. 둥근 그것이 제 손가락에 온전히 꼭 맞춰지면 그제야 웃어 보이면 평소와 사뭇 다른. 그럼에도 처음 우리가 보았던 그 즈음, 언젠가 네게 지어 보였던 환한 미소가 만연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네가 최종장에 선택한 것은 나였으니 당장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아니, 어쩌면 영영 사랑하지 않더라도 괜찮아. 그런 저더러 멍청하다 손가락질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런 네게 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었고 네가 바라는 많은 걸 해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어리석기 그지없는 헌신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며 그로 인해 네가 내 눈을 가리더라 한들 나는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조차 너를 향해 무릎 꿇고 경배를 올릴 심산이니, 이것은 나의 신을 향한 믿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