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

간호

온점001 2024. 11. 1. 19:03

*기울임 처리된 대사는 전부 일본어라고 생각해주세요 uu*....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하얀 천장이다. 익숙하고 진부한 전개처럼 낯익은 장면. 내가 잠에 들었던가. 몽롱한 정신에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길 수번 반복하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이불 위로 무언가 툭 떨어진다. 물에 젖은 수건이다. 그는 그제야 제 앞머리가 잔뜩 젖어있다는 걸 자각하곤 수건을 집어든다. 물을 제대로 짜지 않았던 모양인지 수건이 떨어졌던 이불 위로 젖은 자국이 선명하다.

 

 “깼어?”

 

 낯익은 목소리. 아직 제대로 정신이 들지 않아 무심결에 앞을 보면 작게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사람이 보인다. 쿠로카와 아리. 그의 비즈니스 파트너와 비슷하면서도 영감을 주는 사람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여자친구이기도 했다.

 

 “언제 왔어.”

 “몰라. 한 시간 됐나. 전화하는데 목소리가 안 좋아 보여서 혹시나 하고 와봤지.”

 

 그는 조금 놀란 듯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에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가 덧붙인다. 농담이야. 제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건 가장 잘 알지 않냐는 양 태연하게 구는 모습이다. 단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심심하던 찰나에 바쁘다던 그의 말을 무시하고서 작업실을 방문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보았던 건 작업대 위로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손에 해열제를 쥐고 있었고 그런 그의 근처에는 작업을 하다 만 과제인지 뭔지 모를 것이 있었는데 보나 마나 무리해서 할 일을 하다가 이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처음 봤을 땐 죽은 줄 알았어.”

 “별 일도 아닌 걸로 호들갑은.”

 

 담담하게 대꾸하는 그에게 그녀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뭔가 말을 하는 대신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구석에 박아두었던 작은 베드 테이블이었다. 이내 그것이 그의 앞에 놓이면 그제야 아까부터 바깥에서 풍기는 냄새의 출처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본인 앞에 놓인 한 그릇의 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이나마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니가 한 거야?”

 “왜. 못 미더워?”

 “그런 게 아니……. ……조금.”

 “이게 진짜……. 독은 안 넣었으니까 걱정말지?”

 “……진짜 네가 한 거라고?”

 “…….”

 “…….”

 “……사 왔어.”

 

 그럼 그렇지. 그는 그런 생각과 함께 그녀를 향해있던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뒀다. 느리게 손을 움직여 숟가락을 들었으나 좀처럼 입맛이 돌지 않아 괜히 죽을 뒤적이기만 하자 그 모습을 경멸에 가까운─놀랍게도 이것조차 최대한 감정을 숨긴 것이었다─낯으로 바라보는 그녀. 결국 짜증을 꾹꾹 누른. 그러니까 그녀치고는 꾹꾹 누른 음성을 뱉었다.

 

 “나름 다 뒤져보고 젤 맛있다는 걸로 사 온 거니까 한 술이라도 뜨지? 약도 먹어야 하는데.”

 

 그녀가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수개월 간 만나며 이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약간의 색다름을 느끼며 그가 마지못해 한 술 떠 죽을 입에 넣었다. 그렇게 한참을 오물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녀는 아까 함께 구매했던 다른 약들을 뜯어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의외네.”

 “맛있어? 입맛에 맞으면 다행이고.”

 

 그가 생각보다 죽이 입에 맞아서 의외라고 말했던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약을 그의 죽그릇 옆에 두며 무던히 답했다. 그것 역시 말없이 한참 응시하던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자주 챙겨줘봤나 봐.”

 

 익숙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뱉은 말이었다. 남자들 아니면 동생이려나. 혹은 둘 다일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즈음, 난 또 뭐라고, 하며 작게 읊조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해본 적 없어. 오늘이 처음이야.”

 

 그 말에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던 그의 언어들이 쏙 들어가 버린 건 어딘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한 그녀의 분위기 그리고 풀어진 그 표정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꽤 오랜 정적이 흘렀고 그것을 깨뜨린 건 낯선 그녀의 조용한 음성이었다.

 

 “동생이 이렇게 했던 거 같아서.”

 

 처음 쓰러진 그를 발견했을 때부터 죽을 사 오기 위해 운전대를 잡는 순간까지 꽤 패닉 상태였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선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으니. 물론 그것을 알 리 없는 그이기에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겠지.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떠올렸던 건 제가 엉망일 때마다 혹은 아플 때마다 저를 챙겨주었던 단 하나의 따스한 손길. 그녀는 그 자취를 따라갔을 뿐이었다. 그것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말없는 그녀의 시선은 앞이 아닌 추억 저 편을 그리는 듯해 그는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젠 제법 오래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쓴웃음이 입가에 잠시 머물렀다. 또 한 번의 간극 후 그녀가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다시금 다물고 한 차례 뜸을 들였다. 그렇게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걔가 한국으로 떠난 뒤론 쭉 혼자 지냈는데 아플 땐 생각보다 서럽더라고. 그전까진 걔가 간호해 주던 게 그저 귀찮기만 했는데.”

 

 그녀의 입 밖으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나저나 갑자기 일본어라니. 그는 의아했으나 알아듣는 데엔 문제가 없었으므로 그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 걔가 그 자식을 만난 뒤론 여러 이유로 진짜 엉망진창으로 살았는데……. 그러다 보면 아플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그땐 또 되게 자주 아팠단 말이야.”

 

 자업자득인 꼴이었단 걸 본인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 되게 외롭더라고.”

 

 처음 느껴보았던 고독. 제 옆에 딱 붙어 언제나 저를 돌봐주고 바라봐주는 존재가 있어 좀처럼 느낄 새가 없었던 감각이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더란다. 그땐 이미 너무 늦은 후였지만.

 

 “그래서……. 그냥…….”

 

 삶이나 관계에 대한 태도 기타 등등 생의 전반적인 모든 것을 감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말재주가 있을 리가 없었으니 이런 이야기도 어떻게 끝맺어야 하는지 모르는 듯 어물댄다.

 

 “그냥…… 해주고 싶었어. 외로운 건 싫으니까.”

 

 그가 외로운지 아닌지 그녀가 알 길은 없었기에 이마저도 상대를 고려하기보단 철저하게 제 기준에서 생각하고 결론 낸 이야기인 셈이다.

 

 “아플 때 눈을 떴을 때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그래도 외롭지 않잖아?”

 

 끝내 그것이 걸리기는 하는 모양인지 눈치를 살폈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늘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너한테 받은 것들에 비해서 나는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제멋대로 굴어놓곤 면죄부 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그녀로선 이러지 않고 오로지 타인을 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걸 너도 원할지 어떨진 모르겠지만……. 나는 남들의 기분 같은 거 잘 모르니까…….”

 

 알려고 한 적도 궁금해한 적조차 없었다. 심지어 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의 것마저도. 떠난 후에야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아마 때늦은 후회로 인한 그녀만의 참회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그녀치곤 드문 성장일지도 모르지. 이 모든 건 그녀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무의식이었지만.

 말이 자꾸만 길어지는 데에 반해 도무지 말정리를 하지 못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 좀처럼 제 마음과 생각을 전하는 것이 힘든 것인지 끙끙대는 듯한 모습에─그래도 한국어로 말할 때보단 훨씬 구체적이고 자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손을 뻗었다. 횡설수설 자꾸만 설명하던 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에 그의 손이 툭 얹어지자 그제야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잘했어.”

 

 자그마한 호선을 입가에 새긴 그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그녀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순간에도 뻔뻔스럽기 그지없고 경박스럽기 짝이 없는 그녀. 그런 그녀가 두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 떨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하려 애썼다.

 

 “언젠간…….”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자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언젠간 꼭 말해줘야 할 것 같았어.”

 

 처음에는 그저 의지할 곳이 생겨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또 그 아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너였으니까. 전혀 다른 색의 두 사람이지만 적어도 제게 있어선 그러했다. 망설임 없이 정답을 제시하고 자신이 틀렸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그 오만한 자신감이 그러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교만이라 부를지언정 제게 있어 그것은 단비와 마찬가지였기에. 한심한 이야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나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었다.

 그럼에도 이 또한 언젠간 사라질 연이라 여겼다. 그러니 관계의 시발점에서부터 난 네게 떠날 때엔 반드시 언질해 달라며 징징댔더랬지. 어차피 끝이 있는 관계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그런 생각도 더러 했다지만 아무래도 그 아이나 너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흔하게 있는 타입은 아니라서. 그래서 잠시라도 좋으니 쉬어갈 곳이 필요했을지도.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보다는 조금 더 깊은, 하지만 너무 많은 정을 주진 않으려 했더란다. 애초에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타입과는 정반대였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도 했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인생사 제 맘대로 되는 것 하나 없더라는 걸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다정한 사람은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혹은 귀찮아서 싫었는데. 까칠하고 싸가지 없다가도 본인 나름의 다정을 보이는 행동에 저도 모르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단 걸 최근에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매일 같이 투닥대고 싸우고 으르렁대고, 취향도 맞지 않았고, 가끔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어쩔 땐 혼자 신 나서 진지하게 떠드는 모습이 이상해 보이기도 했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을 네게서 느꼈다. 무엇보다도 넌 나를 한 명의 동등한, 가끔은 그 이상의 사람으로 대해줬더랬지. 신기하게도. 그래, 그 아이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너는 가끔 내가 나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느끼게끔 만들어줬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따금씩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너는 네 말이 나를 다시 일으켜줬다는 걸 알까. 아마 모르겠지.

 이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랑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반대로 그가 저를 진심으로 사랑할 것이란 생각은 여전히 하지 않았으며 되레 믿지 않았다. 그도 그렇지 않은가. 그와 저는 어울리지 않았으니─이 사실을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언젠간 그 역시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찾아가겠지. 그러니 최대한 빨리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건 역시 본능에 충실한 제 천성 탓일까 혹은 네가 내게 주는 온정이 너무나 단 탓일까.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서서히 스며드는 네 다정이 어쩌면 나를 죽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음에도.

 

 “……고마워.”

 

 좋아해 혹은 사랑해가 아닌, 네게 반드시 언젠간 하고 싶었던 말. 해야만 했던 말. 그리고 어쩌면 그 아이에게도 했어야 했던 말. 평소처럼 건성으로 뱉는 것이 아닌 한 글자 한 글자에 진심을 꾹꾹 담은 언어가 그녀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의 입가엔 호선이 짙었고 두 볼을 발그스름하게 붉힌 그녀의 눈매는 둥글게 휜 채였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나 참……. 그게 지금 네 쪽이 할 말이야?”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진 그도 알고 있었으나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죽을 사다 주고, 약까지 챙겨준데다 이렇게 간호를 받고 있는 입장인데 감사 인사를 듣다니. 게다가 평소엔 죽어도 잘 하지 않는 말이었으면서. 정말이지 좀처럼 예상이 가지 않는 여자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가 그를 향해 입매를 씩 올려 보이자 뾰족한 송곳니 두 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스스로 생각해도 저와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웃음이다. 그의 앞에 있을 땐 가끔 이러했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해 본 적이 있던가. 그냥 같이 있어도 좋고 즐거운 사람. 문득 그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언니랑 있어서 좋다던 말. 언제나 저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던 그 아이의 모습 역시도. 어쩌면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아이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해왔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그 후로 며칠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