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

주목 下

온점001 2024. 11. 27. 04:30

 

 

 

 

 

 

 

 

 

 

오직 너를 위해

가장 완벽한 작품이 될게

 

 

 

 연습해 온 것이 있으니 음이탈까지 나진 않았으나 처음부터 불안한 시작을 끊은 저와 달리 상대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무대를 활보했다. 저와 달리 정석적인 연습생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경쟁을 뚫고 이곳에 선 거겠지. 행동 하나하나가 과하지 않고 사랑스러움을 자아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이제 보이는 건 수많은 관객들과 새카만 어둠을 물들인 응원봉들. 왜인지 하얀색이 훨씬 많은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정확한 판단이 되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지는 건 노래 때문일까 무대의 조명이 덥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침착하자. 아슬아슬하게 제 첫 파트를 끝내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잠깐 눈을 감았다.

 

 

 대기실을 나서던 순간, 휴대폰이 울리면 그 위에 '아야쨩 🐰'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그것을 받을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이제 곧 언니 차례지? 상대가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혹시 달달 떨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전화했지.”

 

 언제나 그렇듯 장난기가 듬뿍 묻어나는 다정한 음성. 그 목소리에 파블로프의 개마냥 순간적으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음을 느낀다. 당장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하던 머릿속이 일순 환기가 되며 비워진다.

 

 “응? 왜 말이 없어? 설마 도망치려던 건 아니지?”

 

 나는 문고리를 쥔 채 조용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꽤 긴 정적 끝에 수화기 너머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별 일이네. 언니가 이런 일에 다 쫄고.”

 “아야.”

 “응?”

 

 침착하고 차분한 기색은 여전히 흐트러짐 하나 없이 건재하다. 이런 제 상태를 예상한 것도 아닐 텐데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온전히 저를 맞이하는 그 모습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익숙하고도 낯선 이 감각을 어쩌면 나는 그리워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과 동시에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머릿속을 울리던 심장 고동이 다시 원위치를 찾아 돌아간다. 다시금 느리게 눈을 뜨면 아까와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눈앞에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곳곳에서 빛나는 분홍색 응원봉이 눈에 들어오고 제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가 귓전을 웅웅대는 듯한 감각. 개안된 시야 안으로 온전한 현실이 비로소 눈 안에 서린다. 그럼에도 그 두 눈은 아직까지 불안한 듯 잘게 떨리며 그 빛을 잃은 채다. 집중하자. 오직 그 말만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다시 제 차례가 돌아온다.

 

 

 방금 있던 일을 전부 말하자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짧은 콧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너무나 산뜻한 음성으로 내게 답했다. 마치 지금까지 

 

 “그래서?”

 “응?”

 

 시답잖은 것 이상으로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반응에 되레 당황한 제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람이 평생 언니만 봐야 한다는 이유도 없고. 뭣보다 언니랑 사귀는 사이라 하더라도……. 비즈니스적으론 언니보다 나은 사람이랑 움직이고 싶어진 걸지도 모르지. 게다가 연예계라면 재능과 노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가장 가혹하고 냉정한 곳이잖아.”

 “……속 긁으려고 전화했냐?”

 

 아까보다 가라앉은 음성과 달리 또 한 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인 걸. 덧붙이는 소리에 나도 안다며 속으로 되받아칠 뿐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무심하게도 여전히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또 뭐가 그래서야.”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또 거기서 도망갈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언니는 늘 그랬지. 남들이 자기한테 해준 건 생각도 않고 늘 그때의 언니 기분이 우선이었잖아. 지금도 마찬가지인 거 아냐? 지금 그 한 번의 무대를 위해 그 사람이 언니에게 해준 것들을, 언니는 생각하지 않잖아.”

 “누가 해달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면 그 뒤로 아현아, 하는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몇 분 통화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자신을 봐달라고 재촉인 것인지. 낯익은 그 음성에 저도 모르게 짜증스레 혀를 찼다. 침울하고 울적하던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아까부터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다. 얘랑 통화하는 게 아니었는데.

 

 

 첫 음정이 조금 흔들렸나 싶다가도 아까보단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노래를 이어간다. 사실상 편안하기보단 마음속 깊게 자리하던 의심과 긴장이 심통과 짜증으로 변질된 것뿐이지만.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끝없이 가라앉던 심경의 환기였으니. 조마조마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익숙한 낯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살짝만 옆으로 돌리면 보이는 한 사람.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너 하나만큼은 정확히 찾아낼 자신이 있어. 푸른빛과 황동색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린다. 

 

 

 “늘 가기 싫다며 징징대면서도 요 몇 개월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러 갔던 시간이 아깝지 않아?”

 “그건 지헌이가 시켰으니까…….”

 “수동적인 행동이었다 한들 그것 역시 언니의 노력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젠 언니가 보여줄 차례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알고 있잖아.”

 “…….”

 “그 사람은 언니한테 해줄 수 있는 걸 전부 해줬을 거야. 이제 그 결과를 보여주는 건…….”

 

 아리씨, 대기하실게요. 대기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PD의 말에 그녀의 마지막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을진 대충 알 것 같았으니. 언제나 그렇듯 아이의 말에 틀린 것이라곤 없었다. 재수 없게도. 언제나 이런 식이지. 어르고 달래는 듯 보여도 결국 옳은 말을 하고 좀처럼 반박하기 힘든 말만 뱉는가 하면 좀처럼 도망갈 수 없게끔 사람의 속을 정확하게 찔러대곤 했다. 지금처럼.

 

 “이제 가봐야 해. 끊을…….”

 “한시도 눈을 못 떼게 만들어줘 버려.”

 “응?”

 “감히 다른 곳은 쳐다볼 생각조차 들지 않게.”

 

 

 어떻게 그렇게 매 순간 자신감에 차있을 수 있는 것인지 저로선 평생 이해하지 못할 아이일 테다. 하지만 그런 네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이곳에서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비록 나 따위가 너와 같은 진짜처럼 반짝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쭙잖게나마 흉내내보려 한다.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 차오르는 고양감이 온몸 구석구석에 스밀면 끝내 두 눈이 맑게 번진다. 제 시선 끝에 맺힌 너의 눈길이 오래도록 제게 머물렀으면 하니 아이의 말마따나 해보려 한다. 네가 만들어낸 걸작들 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 네가 영영 눈 돌릴 수 없게. 고작 나 따위가 그런 것이 가능이나 할까 불현듯 고개를 들이미는 의심은 날 위해준 널 생각하며 잠시 미뤄두려 한다.

 

─이제부터 내가 서는 무대는

금부터 내가 부를 노래는 전부 너를 향한 세레나데야.

 

 

 

 

 

 


 

 

 

 

 

https://youtu.be/JqBU5BvBle8

 

 

 

 

 

 

 

 

 

 


 

 

 

 

 재능이 있다고 생각이야 했지만 이 정도였던가. 재빨리 무대 뒤로 이동하며 지헌은 매일 같이 연습하기 싫다며 울고 불며 징징대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움직이는 와중에 휴대폰으로 sns와 각종 포털을 확인해 보면 온통 '아리'라는 단어가 빼곡했다. 방송이 송출되는 시점부터 쏟아지는 기사 하며 반응들. 심지어 본방송의 리액션을 방송하는 스트리머들도 죄다 아리의 가창력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물론 간간이 가벼운 노출 이슈 역시 보였으나 그 비율은 극히 적었다.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지헌의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 백스테이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복도 골목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장난해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듯했다. 억울함과 분노가 혼재된 그 음성은 누가 보아도 화가 잔뜩 난 것 같았으나 조곤하게 말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어 그와 전혀 반대되는 심드렁하기 그지없는 무심한 것이 뒤따랐다. 그것은 저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뭐가.”

 “마지막에 대체 뭐였어요? 사전에 말도 없이 멋대로 키를 올려서 부르면 어떡해요!”

 

 후반 클라이맥스 때 아리가 노래를 리드하는 부분을 의미하는 듯했다. 하긴 그걸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겠지. 그러니 이렇게 화제가 된 것일 테고. 사전에 합의 없는 부분이었으니 상대방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는 부분이긴 했다.

 

 “연습 때도 리허설 때도 그런 거 못했잖……!”

 “안 했던 거야.”

 “그쪽이 못 따라오는 것 같아서 안 했던 거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봐줄 이유가 없더라고. 그게 그렇게 불만이면 너도 키 올리지 그랬어.”

 

 억지다. 억지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으나 그런 말을 하는 아리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일반적인 이론으론 그녀를 상대할 재간이 없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달은 상대는 분한 얼굴로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사실 둘 중 하나만이 살아남는 경쟁 프로그램에서 못할 일도 아니었단 것도 사실이었으니.

 

 “치마 날리게 한 것도 일부러 그런 거죠?”

 “당연하지. 초반에 밀린 거 복구하려면 무슨 수라도 다 써야 했잖아~”

 “……비겁하고 저급해.”

 “꼬우면 너도 까.”

 

 너무나 당돌한 아리의 대답에 상대는 기가 차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씩씩대며 분을 삭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리가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대로 멀어져 가나 싶더니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짧은 탄성과 함께 걸음을 멈췄다. 야, 백여시. 근데 말이야.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그녀가 입매를 씩 올리자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나며 개구진 악동 같은 웃음을 보였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그 어떤 순간에도 도무지 말릴 재간이 없을 때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난 무대 위에서만 승부해.”

 

 


 

 

 

 “아까 뭐라고 말했던 거야?”

 “응? 언제?”

 “아까. 아현이 네 언니랑 통화할 때 일본어로 대화했잖아.”

 “아~ 그거? 별 거 아냐.”

 

 TV에선 생각보다 압도적인 차이로 다음 무대에 오를 자격을 얻게 된 아리의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상당히 되바라지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모습. 실상과 전혀 다른 모습에 픽 웃어버리며 TV를 끈 아현은 소파에 앉아 반쯤 안겨있다시피 하고 있던 유진의 품을 파고들었다.

 

 “도망치니 뭐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서.”

 “오~ 진짜 공부 좀 했는데, 오빠~”

 “그럼. 이 오빠가 또 할 때는 한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만 같은 유진의 모습에 아현이 귀엽다는 듯 작게 웃으며 유진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익숙한 체향에 저도 모르게 움츠렸던 긴장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냥. 언니가 잔뜩 쫄아있어서, 쫄? 하고 긁어줬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나름 이십 년을 다뤄왔으니까. 뭐, 미스날 때도 있지만 이번엔 통했나 보네.”

 

 그런 거 보면 그 사람이 어지간히도 좋은가 봐. 자그맣게 덧붙이는 아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유진이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도와줬어?”

 “그러게. 안 도와주고 이간질하거나 살살 구슬렸으면 그대로 그 사람이랑 쫑나고 나만 이득인데. 그치?”

 “아니. 뭐, 꼭 그런 뜻은…….”

 

 가감 없이 그의 말을 넘겨짚는 제 대답에 곤혹스러워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그냥……. 왜인지 그 사람이 짜증 나고 싫긴 해도. 자의든 타의든 언니가 정한 길이잖아. 그래서 응원해주고 싶었나.”

 

 이전에도 말했듯 그녀는 제 것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그대로 그와 그녀의 사이를 이간질한다 한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사실상 미지수였거니와 무엇보다도 하나뿐인 제 혈육인 언니의 미래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단지 그뿐이었다. 뭐, 간만에 언니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는 것에 만족하기도 했고. 게다가, 짤막하게 덧붙인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가슴팍에 턱을 올려 가만히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제가 좋아해 마지않는 차분한 잿빛 눈동자 안으로 제 모습이 비쳤다. 그것을 한참 응시하다가 눈매를 휘어 웃곤 한 손으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금 있는 하나도 벅차.”

 

 애정 서린 시선에 다정이 짙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얼마 전에 다쳐서 돌아왔던 그의 옆구리를 검지로 꾹 누르면 유진의 몸이 반대쪽으로 비틀리며 앓는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이쪽도 말을 좀 안 들어야지.”

 “아, 아현아아……. 오빠 아파…….”

 “그러게 누가 다쳐서 오래?”

 

 고소하다는 양 한 번 더 쿡 찌르자 결국 유진의 입 밖으로 애절한 음성이 쥐어짜듯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