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글: 토감 AU (+지아)
[유현]
“그걸 여태 안 했어? 안 하고 뭐 했어. 엄마가 어제 저녁까지 끝내 놓으라고 했잖아.”
“그게···.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워서···.”
“그게 왜 어려워. 너는 선행도 아니고 학교 과제잖아.”
“······그래도 어려웠어···요···.”
“그럼 지혁이한테 물어봤어야지.”
잘 정돈된 집안, 구운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노릇한 토스트 냄새. 큰 유리창으로 넘실대는 따스한 햇살까지.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그야말로 완벽한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한 사내와 자그마한 여자아이는 여자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방금 전까지 아빠 이거 봐. 나 이거 한 입에 먹을 수 있다! 하며 계란 프라이 절반을 입에 넣고 우물대던 활기찬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주눅이 든 채 입을 닫았고, 남자는 그런 아이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분위기만 살필 뿐이었다.
“넌 누나가 어려워하고 있으면 알려줬어야지.”
“저도 학원 과제 하느라 바빴어요. 오늘은 중국어까지 있잖아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POSCO raises ship steel prices as Korea's tariffs curb supply’라는 헤더를 시작으로 쓰인 신문을 읽으며 입안의 음식물을 씹는 또 다른 남자아이. 가족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넌 다 했어?”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시간에 쫓기는 듯 연신 손목시계를 체크하며 묻는 여자를 향해 지혁이 물을 걸 물으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아현은 지혁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듯 쓰다듬곤 결국 토스트 하나를 입에 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 손에 닿은 여자아이의 눈길이 부러움에 찬 것을 발견한 건 오직 유진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말을 얹기보다는 자연스레 아현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마저도 됐어. 오빠 아직 다 안 먹었잖아. 앉아있어. 하며 유진의 어깨를 꾹 누르는 아현의 손길에 저지당했지만.
“오빠, 나 다녀올게. 오늘은 좀 늦을 수 있으니까 애들 과제 검사 좀 해줘?”
“오늘은 아침부터 바쁘네.”
“응. 새로운 시안 검토가 있어서. 나 간다~”
아주 집밖으로 나설 때까지 아현은 웃는 낯으로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특히나 제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는 걸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들도 잘 알았다. 그들에겐 더없이 익숙하고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그녀가 가고 난 뒤에야 유진은 여자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눈에 보아도 오늘따라 유독 기운 없어 보이는 얼굴. 귀여운 마이멜로디가 끝에 달린 포크로 베이컨을 쿡쿡 찌르기만 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진이 아이에게로 몸을 숙인다.
“지안이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는데.”
“······다 먹었어. 잘 먹었습니다.”
“더 안 먹을 거야? 반도 안 먹었는데?”
“안 먹을래······.”
지안이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포크를 아래로 내려두자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것이 익숙한 듯 아이는 곧 울 것 같던 얼굴을 제 아버지의 어깨에 폭 박아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혁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누나가 할 때 제대로···.”
“우리 공주님이 왜 이러실까~?”
커다란 손 하나가 한심하다는 양 질책 섞인 음성이 흘러나오는 소년의 입을 가로막았다. 그에 소년은 손의 주인을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뒤로 한참 웅얼거리느라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서러움 하나만큼은 진하게 묻어나는 소녀의 음성이 유진의 옷자락으로 꾹꾹 스며들었다. 두서없고 발음도 부정확해 의미 전달이 되나 싶을 정도였으나 그는 전부 이해한 것처럼 응응, 그랬어? 그렇구나. 하며 간간이 대화에 어울리기까지 했다.
“그게 다 아현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앓느니 죽지.”
소녀의 등을 토닥이던 유진이 아래에서 들려온 중얼거림에 소년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그에 지혁이 또 한 번 유진을 노려보았지만 유진은 이미 거실로 이동한 뒤였다. 우리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속닥대는 유진의 목소리에도 아이는 유진의 목을 끌어안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공원에 오리 까까도 주자. 약 3초 간의 정적 후 아이가 칭얼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다리를 휘적인다. 이 정도면 팔 할은 넘어온 셈이다. 유진이 키득대며 웃었다.
“그리고 티니핑 인형 하나 사러 가면 딱 맞겠다. 그치?”
“······포근핑···.”
“그래, 그래. 포근핑으로 사자.”
“나도. 나도 또봇 사줘!”
또 둘 다 학교를 빠졌다는 걸 알면 아현이가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순간 유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렇게 나는 화는 금방 풀리는 편이므로 그다지 오래 생각지 않기로 했다.
지아지만... 사실상 아리 개인로그에 가까운. 이딴 걸 로그라고 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아리]
“수호야~ 엄마 왔다~”
처음엔 익숙하기 그지없던 엄마라는 호칭도 이젠 제법 입에 붙은 듯 자연스레 꺼내며 집 열쇠를 현관 선반에 던져둔다. 곧 거실 미닫이 문 너머로 웬 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면 피로에 찌들어있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 쪼그려 앉아 두 팔을 벌리면 한달음에 뛰어온 아이가 그녀에게 안긴다. 걸음을 제대로 뗀 지 몇 주 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알려준 건 하나 없는데도 이리 장하게 조막만 한 손으로 저를 끌어안는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내일은 시터 분 오는 거지?”
아이에게 얼굴을 박은 채 상봉을 만끽하던 그녀에게 친구가 말을 걸어온다. 응. 오늘 고마웠어. 그녀는 친구에게 오만 원권 두 장을 쥐어주며 어느새 기절하듯 잠든 아이를 안아 들고 거실로 향했다. 졸리면 먼저 자라고 몇 번을 말했어도 늘 이렇게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니. 매번 어디로 새지도 못하고 퇴근과 동시에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피곤했으나 마음이 차는 듯한 만족스러운 얼굴. 그렇게 스치듯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친구가 한참 고민하다 결국 어렵게 입을 뗀다.
“그······. 내가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닌 건 아는데···. 다시 방송하는 건 어때?”
“엥? 갑자기? 왜?”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아이의 머리를 받쳐 조심스레 눕혀두며 친구를 향해 힐끗 시선을 주었다. 친구는 집안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혼자 살던 그녀가 지금은 방 하나에 거실 하나, 그리고 부엌이 전부인 작은 아파트에 산다. 심지어 그 많던 명품들도 거의 처분했다고 들었으니.
“···힘들어 보여서. 솔직히 아르바이트 두 탕씩 뛴다고 돈이 되진 않잖아. 그때 돈도 많이 벌었고 지금 다시 해도 충분히 벌 수 있는데··· 그냥 일본으로 돌아가서···.”
“됐어. 다 끝난 이야기야.”
“···애 아빠 때문이야?”
“뭐?”
“굳이 굳이 한국에 사는 이유.”
“아니야. 날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 여기 살아서.”
제법 단호한 대답이라 친구는 일차적으로 안심했다. 그래도 애를 가졌던 처음 때와는 달리 많이 안정되었구나 싶어서. 그땐 정말이지 내일 아침에 얘가 살아있을까 걱정이 되었던 수준이었으니. 안도의 한숨을 뱉은 후 그게 누군데. 동생? 하고 덧붙여 물으면 그녀는 아까와 달리 즉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다. 사실 친구도 알고 있다. 그녀가 모아놓은 돈이 충분해 비상시엔 몇 년 간 일을 하지 않더라도 먹고살 수 있을 터다. 하지만 그 돈은 전부 아이를 위해 쓰고 싶다는 것도, 늘 현재만을 살던 그녀가 미래를 위해 투자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그러한 변화는 분명 좋은 방향이었으나 그럼에도 이미 일궈놓은 것을 전부 버린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적어도 제삼자의 눈으로 보았을 땐 말이다.
“방송은 오래 하지도 못하고 바짝 당겨 버는 건데. 더 벌면 좋잖아. 앞으로 수호한테 얼마가 더 들어갈지 알···.”
“방송은 좋든 싫든 자신을 내보여야 해. 뭐든 상품화를 하는 거지. 그게 재능이든··· 본인 자체든.”
그녀가 잠든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적갈색의 머리칼을 지닌 소년. 솔직히 자신보다는 그 사람을 닮았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더러 생각했더란다. 이 아이는 다음에 커 저와 같은 인간이 되지 않길 바랐으니. 저 같은 인간과는 다른 삶을 살길 바랐으니. 애틋한 마음 한 스푼이 든 두 눈에 애심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우리 수호한테 그런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
사랑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모든 걸 내바쳤다. 무엇이든 버리고 나설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제 세상이 곧 사랑하는 대상인 셈이었다. 그것이 제 아이가 될 것이라곤 정말 꿈에도 몰랐지만. 심지어 삼십도 되지 않은 나이에. 하지만 나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중요한 건 지금 제 손가락 하나가 우주인 양 꼭 잡고 놓지 않는 이 작은 생명체 그 자체다.
“우리 수호는 외로움이 뭔지 몰랐으면 좋겠고, 사랑해 달라고 누군가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어디서든 사랑받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고, 매번 일을 망칠까 불안에 떨고 또 내 잘못이라며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았으면 해. 실수하더라도 잘못을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면 괜찮다고 해줄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 자랐으면 좋겠어.”
여전히 불안은 크다.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챙기는 것도 한참 불안정한 제가 할 수 있을까 싶기에. 술을 마셔 살짝 취기가 도는 때와 간간이 오던 그 사람의 연락 텀이 겹치는 날에는 습관처럼 그에게 답장을 할 뻔한 것도 여러 번이다. 그래서 세 달 전 즈음엔 휴대폰 번호까지 완전히 바꿔버렸더란다. 절대 발목 잡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알아서 처신하라 차갑게 떠난 그 뒷모습은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제 가슴 한 켠을 쿡쿡 찌르는 듯했지만. 어쨌든 약속이니까.
“그러려면 내가 똑바로 서야 하잖아.”
그럼에도 그런 감상들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무너져있는 시간이 더 이상은 길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기에. 나는 이제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고 그 존재에게 제가 느끼는 세계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고 물려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방송은 안 해.”
카페 알바도 옷가게 알바도 전부 나름 할 만 해. 내가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건지, 노력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나날의 연속이다. 제 손가락을 쥔 작은 손을 둥글게 말아쥐면 닿아오는 온기가 선명해 저도 모르게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