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Grey Spinning Flower

생일 축하해, 오빠

2023. 12. 23. 03:48

https://youtu.be/N_E6Jnt4zse

 

 

 

 

 

 분명 이럴 것을 예상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침대에서 벗어났던 것인데 아슬아슬하게 시간 내에 끝을 내다니. 소중한 아침잠까지 포기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지금 현 상황은 쉽지 않았던 여정을 설명하기 제격인 셈이다. 조리대 한 편에 놓인 미역은 팅팅 불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양으로 잔뜩 쌓여있다. 채로 썰었어야 할 당근과 파프리카는 조리 과정 중 끔찍하게 난도질 당한 채다. 손질을 한 것인지 만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금치들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으며 통에서 탈출했던 당면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간장으로 이뤄진 크고 작은 웅덩이 하며 미역을 볶다 태워먹은 냄비 등등. 엉망인 것을 하나하나 꼽으면 밤을 새울 수 있는 지경이다. 이론상으론 분명 격한 활동이 없었을 텐데도 질끈 묶어놨던 머리는 부스스하게 반 즈음 풀려있고 매일 한 시간씩 러닝을 하고 통학까지 해내는 제 얼굴엔 드물게도 피로가 가득하다. 태풍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듯한 장면을 착잡한 눈길로 한참 바라보고 있던 저는 이내 그로부터 도피하길 택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지금 이곳보다 더한 지옥도 없을 것이기에. 시선을 돌리면 주방 내부와 달리 그나마 번듯한 식탁이 눈에 들어온다. 뭐, 그래도 이거면 됐나. 방금 전까지 번잡했던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꽤 뿌듯한 눈으로 차려진 상을 보고 있다보면 이내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린다.

 

 “아, 깼어?”

 

 잠귀가 밝아 바깥에서 이는 소란으로 잠을 깬 것은 한참 전일텐데도 어제 당부해 뒀던 말 때문인지 조용해진 지금에야 바깥으로 나왔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을 수 없어 당신의 팔을 잡아 끄는 제 낯에 미소가 만연하다. 잠이 덜 깬 것인지 지금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인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이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당신을 반강제로 식탁 앞에 앉히곤 저 역시 맞은편에 앉아 미리 세팅해 둔 케이크에 불을 붙인다. 그러면 익숙하기 그지없는 생일 축하 노래가 이어진다.

 

 “──사랑하는 유진 오빠~ 생일 축하합니다~”

 

 짧은 박수갈채가 끝나면 굳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어서 불어. 소원 비는 거 잊지 말고. 길지 않은 침묵 끝에 뱉어진 당신의 숨에 촛불이 흔들리다 꺼진다. 그 순간 당신이 무엇을 빌었을지 문득 궁금했으나 구태여 물음을 던지진 않기로 한다.

 

 “한국에선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다고 들어서…….”

 

 기어드는 듯한 목소리와 어색한 웃음은 제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란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세 번이나 다시 끓인 미역국은 소금기를 다 제거했는데도 마지막까지 미역의 짠맛이 도무지 가시질 않았고, 분명 양념에 제대로 버무렸는데도 색이 온전히 입혀지지도 않은 당면과 채를 썬 것인지 막대 썰기를 한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채소로 이뤄진 잡채. 그래도 아까는 나름대로 봐줄만하다고 여겼는데 막상 때가 닥치니 그 감회가 다를 수밖에. 이것을 생일상이라고 차려주었으니 그 정성은 고사하고 결과물에 대한 창피는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윽고 당신이 미역국을 한 술 뜨면 잠시 굳어지는 모습이 확연하다. 그래, 당신은 언제나 솔직해서 좋았지. 미묘한 웃음이 지어지는 것은 하릴없는 일이다.

 

 “굳이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나 정말 괜찮으니까.”

 

 그저 추억을 하나 더 쌓은 셈 치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 것도 제 손으로 직접 누군가의 생일을 챙겨주고 싶단 욕심도. 무엇보다도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날, 당사자에게 맛없는 음식을 강제로 먹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기도 했고. 덧붙이자면 당신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었으나, 숟가락을 입에 대자마자 잠이 확 깨는 듯한 당신이 퍽 귀여워 보이기도 했으니 이 정도면 꽤 즐거운 기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슬슬 치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나려는데 숟가락을 내려둔 당신이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잠깐 놀란 눈으로 보다가 그저 다시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제 입가에 호선이 짙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묵묵히 식사를 하는 당신을 가만 응시하다 보면 문득 이래서 다른 사람들이 특별한 날을 고대하는 건가 싶었다. 크리스마스, 생일, 기념일 등등. 각별하다 여기는 날이 다가올 때마다 설레어하는 건 비단 일자라는 숫자에 불과한 것 뿐만이 아닌. 어쩌면 이런 소소하고 기꺼운 순간이 매년 차곡차곡 쌓여 그날을 특별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앞으로 난 크리스마스 이브가, 당신의 생일이 다가올수록 평소보다 조금은 더 들뜰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사고가 미치자 눈매가 뭉그러지며 미처 다 짓지 못했던 웃음이 끝내 환해졌다. 당신과 함께 하는 하루가 이어질수록 이젠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 없다 여겼던 많은 것들이 새롭기만 해서. 또 그게 마냥 좋아서.

 

 “크리스마스 선물은 조금 있다가 줄게.”

 

 이번에 제가 뱉은 말은 당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일까. 밥을 먹다 말고 저를 담은 그 시선에 의아함이 서리면 그게 또 한 번 사랑스러웠으나 그것과 별개로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쉬이 대답해 줄 맘은 없었다. 아직은 비밀이야. 자그마한 속삭임과 함께 말갛기 그지없는 낯에 또 한 번 서리는 미소가 선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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