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26. 23:47
0
그녀를 생각하고 그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속이 아련히 따스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아니란 사실이 점점 기쁘게 다가왔다. 두 다리로 걷고 옷을 입고 나이프나 포크로 식사하는 것은 분명 몹시 성가신 일이다. 이 세계에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만일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되었다면 이렇듯 신기한 마음속 온기를 느끼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사랑하는 잠자 』 中
1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에는 작은 카페가 있다. <우드스톡>이라는 이름의 영세한 가게다. 그곳에서는 늘 지난 세기의 팝이 흘러나온다. 비틀즈, 레드 제플린, 너르바나, 음악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밴드의 노래가 조화로운 체계로 순환하고 있다. 대화를 방해할 만큼 크지도, 소음이 두드러질 만큼 작지도 않은 음량이다.
테이블은 대부분이 비어 주말 오후치고는 무척 허전했다. 최근 들어 이 골목을 침략하듯 입점한 프랜차이즈 때문일 것이다. 우드스톡에는 높은 브랜드 가치에 저항할 만한 장점이 없었다. 점장은 시그니처 메뉴라는 표현조차 모르는 고집스러운 노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진은 구태여 이 카페를 방문했다. 선글라스 너머 불투명한 시선으로 내부를 훑는다. 건들건들한 걸음에는 무거운 리듬감이 있다. 구두는 자신의 존재감을 재단하듯 잘 닦인 바닥에 닿을 때마다 또렷하게 그는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인테리어 대신 놓인 관엽 식물의 잎을 인사하듯 간질인다. 퍽 가벼운 동작이었다.
유진은 정오 무렵부터 한 시간 반 가까이 그곳에 있었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종종 노골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태도로 보아 지각한 상황이 아니라 그가 지나치게 일찍 온 것 같았다. 잘 훈련된 사냥개는 주인이 목줄을 풀어주더라도 다시 매어주기를 기다린다. 정확히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이면서 모순적으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물론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한 주인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반드시 이치에 어긋나며 예외로 규정해야 하는 관계가 있다. 그는 스스로를 지배하는 주인이었지만, 다른 한 명을 머릿속 한켠에 떠올릴 때, 그마저 자아의 일부로 삼아 존재 의미를 위탁하고는 했다.
늦은 점심이 되어서야 다음 손님이 우드스톡을 방문했다. 아현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휘어진 눈꼬리가 마주하는 사람을 단단히 옭아매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고아현이 인사했다. 퉁명스러운 노인은 그녀를 흘끗 곁눈질하고 턱짓으로 환영했다. 단아한 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간다. 그 앞에 앉아 장난스레 손을 흔든다.
"하여간,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왔는데 커피나 한잔 내어줄 것이지." 유진이 말했다. 조금 들떠 있다. 초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카페는 결코 친절한 편이 아니다.
"응. 나는 에스프레소."
아현은 유진을 무시했다. 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다.
"역시 우리 동생이 뭘 좀 아네. 커피는 블랙이지. 악마처럼 까맣고, 지옥처럼 뜨겁다, 이거잖냐."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고?" 아야는 말했다. 유진은 처음 듣는 눈치였다. 그녀가 웃었다. "어차피 아메리카노 마실 거면서 별 유세를 떨어."
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점장에게 다가간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다른 한 잔도 에스프레소인데, 훨씬 더 쓰게, 알았죠?" 그가 주문했다. 아현은 의외라는 양 그를 바라보았다. 동생의 기대는 언제나 불속에 마른 풀을 던지듯 오빠의 어리석음을 부추긴다. 유진은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신념을 꺾을 수 있었다. 행동의 풍미는 비록 유치한 기법이었지만 오랜 여운을 남길 만큼 그윽했다. 그는 찾아올 쓴맛에 긴장한 채 주머니 속에 지포 라이터를 꽉 쥐었다. 언제나 완벽하게, 그 문장은 아직 너무나도 멀다.
받은 글
'유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기 (w. 아리) (0) | 2023.12.29 |
---|---|
생일 축하해, 오빠 (0) | 2023.12.23 |
늑대 (by. ㅎㅍ) (0) | 2023.12.18 |
목줄 (by. ㅎㅍ) (0) | 2023.12.05 |
갈증 (0) | 2023.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