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4. 14:41
사람들의 일과가 모두 끝나는 평일 오후 열 시경, 카페는 한산했다. 곳곳에 놓인 화분과 행잉 플랜트들에 어우러지는 원목 가구들이 따스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목재 사이사이로 배인 원두향이 제게도 스며드는 듯했다. 커피야 어디서 먹든 그리 취향을 타는 편은 아니었으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 카페를 퍽 선호했다. 마감 시간이 임박해도 혹은 그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곳에 눌러앉을 수 있다니, 카페의 젊은 사장이 저와 친한 언니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이따금씩 이쪽을 힐끗댔지만 나는 구태여 그곳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조용한 노래만이 귓가를 맴돌고 주문한 차를 기다리고 있으면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빗방울이 하나둘씩 모여 아래로 추락했다. 그 위로 이따금씩 비치는 쌍라이트 불빛이 번져 눈이 부셨다. 그렇게 수분 간 멍하니 창밖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앞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으로 당겨졌다. 제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자차 한 잔이 놓였다. 단 건 안 좋아하는데.
시간이 늦었으니까 커피보단 이쪽이 나아. 배려를 가장한 강요가 호흡처럼 자연스레 흘러나오면 그에 맞추어 내려진 잔이 코스터와 맞물리며 소음을 자아냈다. 안락한 패브릭 소파에 깊게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저를 바라보는 시선. 권위적이고 제법 위압이 서린 그것은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기에 그저 웃는 낯을 유지하기만 했다. 얇은 유리창 너머로 드문드문 들리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자동차 바퀴에 찰방이는 물웅덩이 소리 그리고 잔잔한 음악만이 상대와 나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이 노래가 뭐였더라, 문득 그의 존재를 잊고 다른 생각으로 빠져갈 즈음 다시금 상대가 목소리를 냈다.
“바쁜 사람을 불러냈으면 그만한 이유는 있을 거고.”
“아,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씀드릴게요.”
가방을 뒤적이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봉투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시종일관 건조한 오만이 담겨있던 사내의 가면에 그 내용물을 확인한 직후 실금이 갔다. 고작 몇 개의 문자 내용이 프린트된 종이쪼가리 한두 장. 남들이 보기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제아무리 완벽하다고 한들 한낱 인간인 이상 찰나의 동요까지 숨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놓칠 수 없는 법이었다. 잡아떼진 않으실 테고. 담담한 음성이 나아가면 휴대폰의 플레이어 앱을 작동시켜 재생 버튼을 누른 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카운터에 있는 언니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량을 미리 조절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윽고 기계에서 낯익은 목소리 둘이 흘러나왔다. 하나는 사내의 친형임과 동시에 현재엔 제 하나뿐인 가족이 된 유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제 앞의 인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딱히 강진씨랑 뭘 하자고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협박하는 거예요.”
원래 냉소를 띄우고 있었으나 보다 차갑게 식은 사내의 것과 달리 담백하게 흘러나오는 음성이 천연스럽다. 그에 일순 황당한 빛을 띄우는 기색을 뒤로한 채 말을 이어간다.
“유진 오빠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아요. 크게 다치지 않는다면 위험한 일을 계속해도 괜찮아요. 그건 오빠의 선택이고 저는 오빠의 모든 선택을 존중하…….”
“둘이 무슨 관계야. 연인관계인 건가?”
“아뇨. 그게 아니…….”
“그런데 그런……!”
살짝 격해졌던 언성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제자리를 찾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코 쉽지 않은 습관이다. 제가 사내에게 지닌 감정이 어떠하든 그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었으니.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름 호감을 지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마당 빗질을 하듯 가볍게 훑고 지나간다. 생각하기도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짚으며 허공에 손을 내저은 그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 수 있는 그 여유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딱 적당한 간극을 지닌 채라 그마저도 완벽한 수초 간의 시간인 셈이다. 진짜예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서 조곤한 목소리를 낸다.
“전 유진 오빠가 누굴 만나던 누구와 사귀던 누구랑 잠을 자던 결혼을 하던 신경 안 써요. 유진 오빠도 다 큰 성인이고 사람인데 누군가를 자유롭게 만날 권리 정도야 있으니까.”
아니다. 결혼은 얘기가 좀 다르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시선이 모로 기운다. 아, 결혼 이야기는 취소. 짤막하게 덧붙이면 살짝 어두워지는 사내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흘린다.
“……지금 그 관계가 얼마나 미친…….”
“그런데 강진씨,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시는 거 같네요.”
사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자연스레 그의 대화 페이스에 휘말렸다고 생각했으려나.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가 자신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드문 경험에 단순히 놀란 걸 수도 있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기에 나는 그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말했잖아요. 당신, 지금 협박당하고 있는 거라니까.”
그러니까 말하는 건 나라고. 당신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듯 그를 담은 두 눈이 수초 전과 달리 서늘하다. 서로 웃으며 대화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이지만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다시금 내가 이곳에 왔던 이유를 상기한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채 간신히 학교를 가더라도 늘 빼곡하던 노트는 텅 비어있더랬지. 며칠이 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던 시간 즈음 담배 연기가 자욱하던 방 안으로 엉망진창이 되어서 다리를 절며 현관으로 들어오던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회상 속 허공에 두었던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면 그 시선의 끝에 다시금 사내가 자리한다. 차갑고 시리기만 한 푸른 두 눈의 채도가 유난히 낮다.
“고작 스무 살 남짓 먹은 여자애가 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싶어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하고 덧붙여지는 말에 건조한 웃음기가 서린다. 내가 어디까지 가려나. 제 스스로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아닌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걱정하는 셈이다.
“다시 한번만 더 유진 오빠 인생이 불리해지는 일을 시키거나 강요한다던가. 그제 같은 일이 번복되는 상황은 앞으로 영원히 없어야 할 거예요. 만약 그러면…….”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사진 한 장을 테이블 위에 가볍게 툭 던진다. 사진 속 익숙한 여인의 얼굴을 본 사내의 표정이 일순 험악하게 물든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것일까. 기특하게도 여태 곱게 다물려 있던 입이 일순 달싹인 듯도 보였지만 곧 이어지는 제 말로 가로막힌다.
“오빠도, 나랑 똑같은 지옥에서 살아가게 될 테니까.”
지금까지와 달리 친근하기 그지없는 호칭과 말투였으나 휘지 않은 두 눈에 서린건 냉소다. 적어도 제 소중한 사람의 가족이니 지금까지 그가 저지른 만행은 애교로 치부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이만한 호의 정도야 보낼 수 있는 일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하려던 말은 끝마쳤기에 지체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차 잘 마셨어요.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찻잔은 이미 다 식은 채다. 그것에 잠시 시선을 둔 사내가 헛웃음을 짓더니 다시금 저를 응시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코트와 가방을 챙겨 자리를 뜰 채비를 끝낸 후 등을 돌린다. 깔끔하고 단정한 로퍼가 나무바닥을 또각이는 소리가 몇 번이나 울렸을까.
“넌 무서운 것도 없나?”
어이가 없어 보이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저 순수한 의문을 담았을 수도 있는. 아직 저로선 그 의중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음성이 제 발목을 잡는다. 과연. 솔직히 감탄을 섞지 않을 수 없었단 걸 인정할 수밖에. 하나뿐인 아내를 빌미로 협박당한 것이 수십 초 전인데 너무나 평이한 음성이다. 그것과 별개로 그 물음에 대한 의도가 꽤 명백한 것이라 그에 수긍하고도 고민에 빠진다. 확실히 공권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검사인 데다 불법적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모습을 잘 알고 있으니.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악한 사람이었더라면 그날 사라졌던 건 그 사람이 아닌 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인 셈이다. 아니, 앞으론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나는 천천히 뒤돌아 태연하기 그지없는 그의 얼굴을 마주한다. 많죠. 짤막한 대답이 나오면 늘상 보이던 부드러운 웃음이 입가에 서린다.
“늦은 밤 귀갓길도 무섭고, 길거리에서 나는 싸움도 무섭고, 가끔 과하게 저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무섭고…….”
그 뒤로도 몇 가지 더 예시를 나열하다가 뭐, 많아요. 하고 대화를 닫는다. 무서운 것들을 읊는 제 낯이 너무나 태평해 오히려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진다.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이제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알았거든요.”
당신 덕분에. 구태여 뱉지 않은 말을 목 안으로 삼키곤 짧게 목례를 한 뒤 서둘러 걸음을 재촉한다. 기다리고 있으려나. 혼자 있는 거 싫어할 텐데. 카페를 나서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얼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여 익숙한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오빠'라는 두 글자가 화면 위로 떠오른다. 신호음이 몇 차례 가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리면 그제야 긴장되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며 입매가 편안한 호선을 그린다.
'유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출 (by. ㅎㅍ) (0) | 2024.01.06 |
---|---|
TS (0) | 2024.01.05 |
지배 (w.강진) (0) | 2024.01.02 |
내기 (w. 아리) (0) | 2023.12.29 |
생일 축하해, 오빠 (0) | 2023.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