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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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고, 나카타 씨. 매일 때가 되면 날이 밝지. 그러나 거기 있는 건 어제와 똑같은 세계는 아니지. 여기있는 건 어제의 나카타 씨가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 『 해변의 카프카 』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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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는 복수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 단어다. 세 음절뿐인 울림에 그렇게 되길 바라는 간절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생존자들이 암시하는 내용은 명백하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는 짧은 메시지다.
주민센터 복합청사를 개조한 피난처는 비록 아늑하지 못하더라도 안전한 생활을 보장했다. 대피소 개방 첫날부터 정치인이 나서 몇 번이나 강조한 공언이었다. 여기에서는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실과 절망이 병균처럼 창궐하는 이 위태로운 현실에 모두가 가까스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건 그 덕분이었다.
아현은 자신이 생존자들의 일부라는 생각을 한다. 천안 터미널을 벗어난 지 이제 일주일하고 이틀이다. 비슷한 뉴스가 같은 시간마다 철새처럼 반복해서 돌아온다. 정부는 인명 피해 방지와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데에 여념이 없다. 어제는 백화점에서, 그저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다른 생존자들이 구출된다. 오늘치 배급품을 두 손 가득 쥔 채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본다. 새장에 갇힌 기분이다.
“답답하지?”
유진이 물었다. 그는 자연스레 아현의 품에서 무거운 짐을 옮겨 들었다. 그녀는 놀란 듯 어깨를 들썩이다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커피 한 잔에 목숨 걸던 게 어제 같은데.” 그가 넉살 좋게 말했다.
“어제 맞아.” 아현은 유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거 때문에 오빠랑 은정 이모랑 한참 싸웠잖아.”
물론 그의 경우엔 커피 한 잔 때문이라기 보다 상대쪽에서 멋대로 자신을 오해하고 몰아가는 탓에 어쩔 수 없었지만서도. 그는 그 말에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는 늘 그렇듯 뻔뻔한 미소가 있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어도 대피소의 분위기는 암울하다. 매일 똑같은 배급이 주어질 뿐 노력이나 어떤 행동으로 미래를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치품이 인간성을 저울질해야 할 만큼 귀하다. 고작 인스턴트 커피 몇 포를 얻으려 언성을 높이는 건 요즘 들어 흔한 일이다. 어제 일어난 다툼이 고스란히 오늘도 반복된다. 내일은 더할 것이다. 마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것 같다.
배급품을 내려놓은 유진은 아현 옆에 섰다. 그리고 어색한 듯 헛기침을 했다. 아현은 그를 곁눈질로 살피며 가까이 붙었다. 부러 기척을 내는 짧은 걸음이 장난스러웠다.
두 사람은 분주한 무리로부터 떨어진 채 대피소 안을 관람한다. 오늘 받은 음식을 행여 빼앗길까 봐 끌어안은 남자가 쓰러지듯 누워 있다. 부모는 몇 개 없는 사탕으로 우는 어린아이를 달랜다.
“오빠가 있는데 아무렴 어때. 답답해도 상관없어.” 아현이 뒤늦게 대답했다. 산뜻한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다정했지만 표면적이었다.
“그래도…….” 유진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아현은 추궁하는 대신 그의 어깨에 머리를 맡겼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행동에 이번에는 그가 당황했다. 하지만 자세를 바꾸지는 않았다.
“오빤 답답해서……. ……싫어?”
넌지시 잡은 손으로 깍지를 낀다. 그를 올려다 보는 둥근 시선은 여태 그래왔듯 순진하고 천진했으나 오직 그에게만 실린 강압이 선연하다. 이는 필시 바라는 대답을 달라는 강요이자 어리광인 셈이었다. 맞잡은 따스한 손의 온기가 이리도 선명하니 불과 며칠 전의 기억이 다시금 차오른다. 꿈이 아니다. 이건 선명한 현실이었으며 이상이었다. 그의 입가에 호선이 새겨진다.
“글쎄…….”
짓궂은 대답이다. 고개까지 인파로 돌려버리며 모호한 답을 뱉는 음성이 퍽 즐거워 보인다. 그 말에 놀란 토끼눈처럼 동그랗게 뜨인 푸른 두 눈이 그의 옆모습을 담다가 이내 얄밉다는 양 가늘어진다. “……못됐어. 진짜.”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다른 손으로 그의 팔뚝을 가볍게 쳤지만 쥐고 있는 손을 놓을 맘은 없어보였다.
“그나저나 요즘은 잘 자네. 어제도 그렇고. 술도 없는데.” 수초 전과 다른 담담한 모습. 떠보는 듯한 음색이었지만 분명 어딘가 묘하게 들뜬 듯한 음성이었다.
“그렇지.” 유진은 뜸을 들여 말했다. “딱히 술이 필요가 없어서.” 머리칼을 매만지며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지는 모습이 멋쩍은 듯 보였다.
그 자그마한 덧붙임에 아현이 웃었다. 분명히 앞으로도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익숙한 텀블러가 눈에 들어오면 지금도 가득 들이켠 알코올의 차갑고 뜨거운 모순이 입 안에 머무는 듯했다. 이성을 가열하는 어지러운 취기와, 욕망으로 얼룩진 감촉도 말이다.
“난 여기가 좋아.”
아현은 말했다. 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로 하여금 언제나 새로운 경험에 시달리게 만든다. 유진이라는 인물은 그녀에게 있어 즐겁고도 괴로운 미지의 현상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불행에 빠질 틈이 없다. 그가 있기에 이 열악한 환경을 둥지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아현 자신도 놀랄 만큼 이질적인 집착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이유를 붙이기는 힘들다. 그녀는 그를 볼 때 떠오르는 심경을 애정이라는 단어로 정의하지 않는다. 어차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 애매함에 진저리가 날 때까지 방치하기로 한다.
“그럼 나도 마음에 드는 걸로 할래. 좋네. 아늑하고.”
“여기가? 커피 한 잔 편히 못 마시는데?” 아현이 물었다. 그가 한 말을 짓궂은 농담으로 들은 모양이다.
“응.”
유진은 대답했다. 네 곁이, 그 말은 결국 꺼내지 못했다.
진저리가 날 만큼 방치된 애매함이 익숙하다. 그는 쓴웃음을 짓는다. 아현의 언행은 유진에게 너무나도 자극적이다. 고작 옆에 있을 뿐인데도 동요하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다. 어째서 이렇게 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녀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새장에 머무르고 싶다면 그는 기꺼이 한 줄기 횟대가 되어 자신을 내어준다.
대피소의 문이 열린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 바깥은 어두운 밤이다. 두 사람은 여전히 생존자들이며, 지옥 속에 고립되어 있다. 하지만 탈출구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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