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Grey Spinning Flower

난제

2024. 3. 23. 19:45

https://youtu.be/j7WLeASOiPA

 

 

  중간고사 전 가볍게 보는 쪽지시험.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교수님의 의견일 뿐이고 비율이 적다고 한들 성적에 반영이 되는 것이었으니 결코 가벼이 여기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오고 그에 수많은 한숨이 섞여든다. 그러한 무질서 속에서 필기구 잘그락대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하교 준비를 하고 있으면 낯익은 얼굴들이 다가온다. 그 후에는 언제나 똑같은 대화의 반복이다. 그 문제 답 뭐 적었냐는 둥 이번 시험 어렵지 않았냐는 둥. 아직까지 조금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아현이 너는 외국인이라 좀 더 어렵다거나 힘든 부분이 있었냐는 질문 정도일까. 혼혈이라 하더라도 제 유창한 한국어를 익히 들었을 텐데 그러한 시각은 나름 신선하다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젠 외국인도 아닌데. 하긴 제가 말한 적이 없는 걸 상대가 알 리는 없었으니 구태여 설명하진 않는다. 일단 나갈까? 수많은 물음 중 어떠한 것에도 대답하지 않고 대신 자그마한 웃음만을 보이면 그제야 그들 역시 가방을 챙긴다.

 

 “아야짱!”

 

 강의실을 나오자마자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낯이 익은 것도 같았다. 제가 나온 뒷문에서 조금 떨어진 앞문 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한 사내. 꽤 훤칠한 모습이 제법 신경을 쓰고 온 듯한 모양새라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제 친구는 눈치도 없이 옆에서 휘파람을 불었지만. 이번에 복학한 선배라고 했던가. 개강파티에서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것저것 챙겨줬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알아두면 나쁠 것 없는 선배라는 지인의 말에 그저 호의를 건넸던 것뿐이었는데. 그는 언제 한 번 밥을 꼭 사고 싶다고 하더니 그 이후로 몇 번씩이나 연락을 해오곤 했다.

 

 “저…….”

 “오늘은 꼭 같이 밥 먹는 거야. 이번까지 거절하면 벌써 다섯 번째거든.”

 “그게…….”

 

 시원스레 입매를 당기는 사내와 달리 난색을 비치는 저였다. 그런 제 낯에 그의 얼굴에 웃음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면 가슴 앞으로 두 손을 소리 내어 모았다.

 

 “진짜 죄송해요!”

 

 모은 두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고개는 앞으로 고정하고 동그랗게 뜬 두 눈만을 슬쩍 올려 그를 바라보면 꽤 당황한 낯이 보인다. 작게 올라간 입꼬리 하며 순하게 휘어지는 미소가 그를 향해 부드러운 호의를 전한다. 미안한 기색은 3할 정도면 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보다는 언제나 뻔뻔스럽고 당당한 사람들에게 되레 약한 법이니. 거기에 귀여운 애교가 더불어지면 대부분 못 이기는 척 넘어가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봐. 경직되던 얼굴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약간의 당혹감과 호감 짙은 설렘만이 남게 되잖아.

 

 “사실 학교 이후엔 대체로 집으로 곧장 돌아가야 하거든요.”

 “아……. 집이 엄해?”

 “음, 그렇다기보단……. 아, 그러면 다음에 수업 중간에 같이 학식당에라도 가요, 선배.”

 

 간단한 질문 하나에도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그에게는 루즈로 덧칠된 거짓을 뱉기보단 달콤한 사탕을 물려주는 편이 효과적일 테지. 다음에 언제? 집요한 사내다. 조금 들뜬 것도 같은 모습으로 끝까지 물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 이렇게 굴 모양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결국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내일은 어떠세요? 그 한 마디에 화색이 도는 얼굴이다. 이걸로 됐다. 단 둘이 밥을 생각은 없지만 만약 일이 틀어져서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짧은 점심시간에서 학식 한 끼 정도야. 사내는 오늘 저녁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기분 좋게 웃으며 멀어진다.

 

 “너 요새 수상해.”

 “응? 뭐가?”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천진한 얼굴이 여전했다.

 

 “예전엔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면 군말 없이 그래, 그래. 하던 애가 바쁘다느니 할 일이 있다느니 하면서 한 시간을 안 어울려주고. 여기저기 모임이란 모임에는 대부분 다 참석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애가 수업 끝나면 집에 꿀단지 숨겨놓은 사람마냥 쌩 가버리고.”

 “으음……. 내가 그랬나?”

 “어. 그랬어.”

 

 못마땅하다는 듯 저를 보는 친구의 모습에도 그저 작은 웃음소리를 흘릴 뿐이다. 그랬던가. 남들을 대하는 게 그렇게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타인의 눈에는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11월 터미널부터 대피소, 그리고 지금까지. 채 몇 개월도 되지 않는 시간. 고작 이 기간의 모든 행보가 매 순간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이전의 많은 것들이 어쩐지 희미하게만 느껴져 모든 말들이 잘 와닿지 않는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히 내 안의 많은 것들의 순서가 재정립된 탓일 수도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선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이번에도 그저 생각의 흐름 속으로 고민을 넘겨버린다. 더 이상 중요하다 여겨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꼭 아현이 너랑 저녁…….”

 “미안! 나 오늘도 들어가 봐야 해.”

 “야! 아니진짜너무한거아니야?요즘나랑너무거리두는거같은데?우리이것밖에안되는사이었어?”

 

 정말 서운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낯의 친구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듯 눈치를 살폈다. 어딘가 화가 난 것처럼도 보이는 모습에 이걸 어쩌지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자그마한 음성이 흘러나오면 친구도 속사포로 던지던 말을 멈추고 제게 집중했다.

 

 “얼마 전부터 집에서 나만 기다리는 강아지 하나가 있거든.” 이어지는 잠깐의 정적.

 “그런데 분리불안이 조금 있어서.” 덧붙인 목소리가 담담하다. 눈을 데록 굴린다. 뭐, 그렇게까지 거짓말은 아니지 않나. 제가 바빠져서 함께 지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누가 봐도 침울해지는 사람이니까. 하고 생각하며.

 “되도록이면 빨리 들어가야 해.”

 “야. 넌 뭐 그런 얘길 이제 하니? 서운하게.”

 

 친구의 표정이 진지했다. 나도 볼래, 강아지. 덧붙이는 어투 역시 얘가 이렇게까지 진지했던 적이 있었던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 모습에 소리 내어 자그맣게 웃고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진짜 다음에는 보여줄게.”

 “……진짜 약속했다?”

 “응. 아무한테도 안 소개시켜주는데. 너는 특별히 시켜줄게. 약속.”

 

 매사가 가벼워 보여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이었다. 제가 묘하게 남들에게 선을 긋는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단어였을지도 모르지. 특별히. 그 표현이 거짓인 것도 아니었으니 상대는 그렇지 않은 척 애썼지만 곧장 표정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그에 나는 옅은 미소가 서린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에 지장까지 찍고서야 친구와 헤어질 수 있었다.

 

 

 

 


 

 

 

 

 오후 6시경. 집으로 일찍 돌아온 제가 무색하게 집은 텅 비어있었다. 오늘따라 피곤한 일이 많은 날이었지. 덕분에 자꾸만 잡음이 머릿속에 스민다. 음악 하나 들리지 않은 고요한 공간에 종이 넘기는 소리와 펜이 움직이며 사각대는 소리만이 빈칸을 메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시계의 짧은바늘이 11의 정중앙에 위치할 때 즈음. 그 적막을 두드리는 건 낯익은 도어락 소리다. 곧장 몸을 일으키고 현관으로 달려 나가기까지가 한달음이다. 어쩌면 분리불안은 이쪽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빠, 왔어?”

 “응. 아이고……. 피곤하다. 밥은 먹었어?”

 

 아니, 응. 대충. 어이없을 정도로 건성인 거짓말에 황당한 눈길로 저를 보는 시선조차 괜히 즐거웠다. 입고 있던 코트와 선글라스를 대충 벗어두곤 소파에 가 눕는 그를 졸졸 따라갔다. 그러는 동안 조용히 코를 찡긋거리니 낯선 향수 향기 대신에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겨울내음만이 비강에 흘러들어온다. 그게 또 맘에 들어 몰래 입꼬리를 당긴다.

 

 “그래도 뭐라도 좀 먹지.”

 “그렇게 동생이 정 걱정되면 좀 일찍 와서 먹여주지 그랬어.”

 

 걱정에 기반한 말에 염치없는 대답을 내놓으면 그 어투 역시 상당히 건성이다. 그가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그에는 관심 없다는 듯 혹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위에 엎어지듯 앉는다. 낯익은 회색 눈동자 안에 제가 비췄음에도 언제나 그랬듯 도무지 어떠한 것도 쉽게 읽을 수가 없다. 누구나 제게 바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하다 못해 제게 바라는 모습이나 행동이 있기 마련인데 그에 대한 기대조차 읽어낼 수가 없어서 결국 입을 연다.

 

 

 

 “오빤 내가 어떻게 굴 때가 젤 좋아? 아니면 귀엽다거나.
 “오빠가 화나거나 삐쳤을 때 내가 어떻게 해줬음 좋겠어?

 “오빠는 나한테 특별히 바라거나 내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게 있어?

 

 어쩌면 정말이지 뜬금없는 소리였다. 제 하루가 어땠는지 알 리가 없는 당신이기에 귀가하자마자 뜬금없이 쏟아지는 말들이 당혹스러울 법도 한데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 대신에 그저 잠잠하게 제 말이 끝나길 기다리는 모습이 익숙하다. 한동안 어떠한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끝까지 제 반응이 이어지길 기다리는 모습 역시도.

 사람들이 굳이 입 밖으로 뱉지 않아도 그들이 제게 어떤 이미지를 요구하는지 안다.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어떤 말을 해줬으면 하는지도. 그들의 요구나 기대를 눈치껏 알아맞히고 그에 들어맞는 반응을 보여주면 남의 호감을 사는 건 쉽다. 여태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런 제가 이러한 질문을 당신에게 직접 묻기까진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는 걸 알까. 오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그럼에도 뻔뻔한 모습을 꽤 잘 유지한 채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슬 기운다.

 

 “그냥 어떤 나라도. 정말 그냥 나라면 뭐든 괜찮아?”

 

 평소였다면 확신한다는 양 평서문으로 끝날 말이었으나 이번엔 질문으로 끝맺는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만큼 납득할 수 없는 말인 셈이기에. 누구도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제 협소한 인간 경험에 기인된 편협한 결론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결국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다.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 그가 꽤 오래 말이 없다. 아마 어떻게 말해야 내가 곧이곧대로 믿을지에 대한 고뇌를 하는 것이겠지.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가 결국 단 한 마디를 뱉는다.

 

 “응.”

 

 아현이 너는 그냥 너잖아. 짤막하게 덧붙이는 말 한마디도 뻔하디 뻔한 말이다. 어쩌면 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일수도 있고 지금 당장엔 진실이더라도 나중엔 거짓이 될 수 있는 말이었으나 나는 그저 웃어버린다. 제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눈치싸움을 하며 기를 써도 당신은 지금의 내가 절대 풀어내지 못할 난제였으니, 그저 믿어버리기로 한다. 그 무조건적인 애정을 다시 한번 삼켜보기로 한다. 언제 맛봐도 기분 좋은 이 단맛에는 치명적인 중독성이 서려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그 무엇보다 사랑스럽다는 시선 안으로  저를 올려다보며 웃는 당신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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