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13. 00:48
의심으로 시작한 호기심이 확신으로 바뀌면
그게 사랑이야
“언제까지 모른 척할 셈이에요?”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이제 와서는 별 의미 없는 물음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늘 그를 눈으로 좇고 있었고 바깥을 살펴보러 그가 베이스캠프를 떠날 때면 답지도 않은 불안을 억누르려 애쓰곤 했다. 누가 봐도 학식이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바른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다지 성실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선해 보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라면 모를까. 그럼에도 묘하게 시선을 끌더니 이젠 아주 붙박은 채 놔주질 않는다. 그러곤 아무것도 모르는 양 구는 작태는 평소와 전혀 달라진 모습이 없으니 심술이 나지 않고 배기겠는가.
“오빠도 알잖아요.”
여상한 말투는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듯 혹은 그저 가벼운 대화주제를 던지는 듯한 투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지금으로선 저 역시 알 방도가 없었으니. 그런 제 어조에 그는 선글라서 너머에서 저를 가만히 응시하던 시선을 느릿하게 굴리더니 이내 뒷목을 매만진다. 나는 그 모습이 얄밉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미약한 불만을 담는다. 그래, 아쉬운 건 이쪽이라 이거지.
“내가 오빠 좋아하는 거.”
뚜렷한 목표가 세워지면 그 후로 후퇴는 없다. 늘 이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제 인생의 철칙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순간은 겪어본 적 없지만 지금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 없지 않은가. 처음엔 불편한 이질감을 의심하고 부정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행위가 부질없음을 알기에 나를 내려놓고 운명의 탁류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스스로를 제어하는 데에 있어서는 꽤 통달했다고 생각했는데. 나, 고아현 21년의 삶 중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위대한 서사시라던가 아름다운 동화 속에서도 절대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칭송하고 울고 웃는 이 감정에 대해서 오랫동안 궁금해하고 끝없이 찾아 헤매왔지만. 만약 지금 내가 발견한 것이 그들이 그토록 노래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면 인간은 분명 기본적으로 피학적 기질을 지닌 엄청난 변태임에 틀림없다. 나는 나의 오랜 호기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을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토할 것 같이 울렁이는 낯선 감각에 현기증까지 일 지경이라 불쾌하기 그지없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던가.
깃털같이 한들대는 제 꼴에 무게감이라곤 조금도 실리지 않아서 그런가. 굴리던 시선의 끝을 제게 다시금 맞추더니 그 역시 일상과 다를 것 없이 한쪽 입매를 씩 올린다. 그 모습이 한없이 가볍기만 하다. 그저 귀여운 동생을 보는 듯한 시선이 처음엔 꽤 신선하기도 즐겁기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성에 차지 않다 못해 가끔은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좀처럼 제 선 안으로 누군가를 들이지 않는 그가 이따금씩 보이는 다정조차 그곳엔 한 톨의 사심조차 서리지 않은 채였으니. 그저 아주 단순하게 보호자가 피보호자를 대하는 태도. 그 눈빛 역시 강아지 내지 고양이.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약한 토끼 따위의 소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으니 마음에 들 리가.
“나도 너는…… 좋아하는 편이야.”
능숙하기는. 본인은 자각도 없는 모양이지만. 아니, 그러니 더 얄미울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런 생각과 함께 잔뜩 골이 난 얼굴이 되려는 걸 간신히 참아낸다. 그건 당연한 거고. 일그러질 뻔한 미소를 간신히 지켜내곤 괜히 새침하게 받아친 후 그대로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가면 뒤에서 들려오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홱 등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
“뭐가 웃겨요?”
“아……. 기분 나빴어? 그렇담 쏘리.”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체적인 뉘앙스가 곤란한 기색을 살짝 띄우고 있다고는 해도 팔 할 이상은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라 진정성이라곤 없었다. 고개만 돌린 채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완전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선다. 그런 제 낯은 상당히 담백했고 오히려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마주한다.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닌데.”
상황이 이래서 제 진심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걸까. 어느 쪽이든 사실 큰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그저 넘겨버리곤 그를 가만히 담고 있던 두 눈을 가볍게 휜다. 부드럽고 다정한,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나 타인에게 향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그곳엔 분명 보기 드문 애정이 서린 채다. 적당히 놀리는 게 좋을걸요. 작게 소리 내어 웃는 데에 뒤따르는 음성이 태연하다.
“어차피 오빠도 날 좋아하게 될 거니까.”
그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는 양 자신만만한 작태에는 스스로에 대한 과신이 아닌, 오롯이 상대를 향한 온전한 마음만이 가득 담긴 채다.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제 낯을 가만 바라보던 그가 수초 후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지만 그에 기죽지 않고 보다 입매를 시원스레 끌어올린다.
절체절명의 순간, 분명 유진이 움직이는 것이 가장 최선책이자 전부가 살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상황이었다. 그래,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정답이라 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가 가장 위험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원래 있던 곳에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만을 한 채 오직 그만이 홀로 죽음의 순간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후 정신을 차렸을 때에 나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엄청 빠르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최소한 노력은 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체력은 자신이 있는 편이었으니. 물론 이것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때도 지금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리고 좀비 떼들을 향해 소리를 치며 동료들을 등지고 뛰던 순간부터 모든 건 이미 돌이킬 수 없었기에. 내가 미쳤지. 그런 생각을 잠시간 했던 것도 같은데, 경악에 물든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얼굴만이 선글라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기에. 그 순간에조차 그것이 제일 아쉽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진짜로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가서야 좀비 떼를 간신히 따돌리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길목, 멍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꾸중과 울음 섞인 걱정과 안도를 내비치는 사람들 속에서 언제나 그렇듯 입매를 올린 채 웃고 있던 중 갑작스레 몸이 돌려졌다. 생각지도 못한 거친 손길에 하마터면 힘이 풀린 다리에 넘어질 뻔했지만 제 팔뚝을 단단히 죈 손길에 그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너 미쳤어?”
“아! 아파요.”
돌아와서 마주하면 화를 낼 것 같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팔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가해지면 어색하게 지어 보이던 웃음마저 살짝 일그러진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잖아. 그럼에도 저를 노려보던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양 똑바로 마주하다 못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자 결국 그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아마도 그 스스로도 모르게 조금 더 언성이 올라가겠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그맣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보는 눈이 많아요.”
그 한 마디에 그제야 주변의 힐끗거림이 눈에 들어오는 듯 그는 잠깐 말이 없다가 이내 저를 붙잡은 채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길목은 확실히 이목이 덜하긴 하지. 얌전히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나 하던 와중에 그가 거칠게 저를 벽으로 몰아세웠다.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모양인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는 저를 앞에 두고 한참 노려보더니 결국 많은 것을 꾹꾹 눌러 담은 음성을 뱉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다정하게 구니까. 오빠가 이렇게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요.”
진지한 기색이 역력한 그와 달리 그렇지 않냐는 듯 산뜻하게 웃는 제 모습에 선글라스 너머임에도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선연했다. 그 순간, 왜인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더러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던 당신의 말이 떠올랐다. 틀린 말은 아니지. 제가 어떠한 성정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거니와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는 미친 게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할 정도로 이해가 되질 않았으니. 그도 그럴 것이 논리적으로 도출된 최고의 답안을 제 발로 걷어차고 무모한 선택을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좋아하니까. 당신이 살았으면 했으니까. 치기 어린 미숙하기 그지없는 행동인 셈이다. 그래, 제 행동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번에 그가 지어 보인 헛웃음은 냉소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길 수십 초. 체감으론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지던 정적이 마침내 깨졌다.
“아가씨, 똑똑한 줄 알았는데 사람 볼 줄 모르나 봐.”
어느새 첫인사 그때 그대로로 돌아간 호칭에 가슴 한편이 콕콕 찔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지. 기분 나빠.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에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크게 울리며 무언가를 꾹 눌러 삼켰다.
“……날 좋아한다고 했지.”
어지럼증과 함께 울렁이던 속을 가까스로 가라앉혔을 무렵.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얼굴이 제 바로 앞까지 다가와있었다. 낮게 울리는 그의 음성이 바로 코앞에서 경고하듯 읊조리고 불투명한 선글라스 렌즈에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시선이 가깝다. 아직 완전히 알지도 못하는 사내의 위협. 겁을 먹어야 정상일 텐데 눈치도 없는 심장은 고막을 마구 때리는 듯 머리까지 울려댔다. 그의 물음 아닌 말에 의문을 표할 새도 없었다. 그의 손이 다시금 제 팔을 쥐면 주먹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그가 가까워진다. 그의 머리칼이 제 눈가를 간질이고 입술의 위치가 서로 겹쳐진다.
“……오빠야 말로 사람 볼 줄 모르네.”
하지만 그와 온기를 맞대는 일은 없었다. 그가 닿기 직전 재빨리 그 사이로 손을 넣은 채 그 위에서 작게 웃었다. 눈매가 순하게 휘어지면 으레 그러하듯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낯이다. 고작 이런 걸로.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더란다. 애도 아닌데, 자는 것도 아니고 키스 정도야. 천연덕스레 덧붙이며 그를 가볍게 밀어내지만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작은 목소리를 이어간다.
“그치만 역시…… 우리 둘의 첫 키스는, 오빠가 나한테 죽기 살기로 매달리게 된 후가 좋을 것 같아.”
장난스럽게 이 순간을 모면하려는 것이 아닌 진심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쉬움이 가득 남은 손길이 그의 입술을 짧게 매만지다가 이내 그를 부드러운 손길로 밀어낸다. 이러려고 이곳까지 와서 언성을 높였던 게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이 빤히 드러나는 순진한 낯에 키득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웃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더 이상 화를 낼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이미 본말전도가 된 지 오래다. 이미 제 페이스 안이라는 걸 저도 알고 그조차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복도를 나가기 직전에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기대하고 있을게?”
윙크를 하곤 살짝 내민 입술 위로 가벼운 손키스를 날리는 일련의 행동이 한없이 장난스럽다. 물론 내뱉은 말들에 담긴 모든 건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진심이었지만. 그도 알고 있으려나. 아마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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