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3. 02:01
#1
짙게 깔린 안개 너머를 노려 보았으나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그럼에도 여유로운 걸음을 느릿하게나마 옮긴다.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위를 바라보자 반투명한 결계가 좁지 않은 공간을 반구처럼 둘러싼 채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쪽을 먼저 공략하는 건 당연한 상식이기에 그를 쫓아왔던 것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게다가 분홍 머리 쪽은 아현이 맡는다고 직접 이야기까지 했으니 사실 제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럼 이제 어쩐다…….”
미약한 한숨을 섞은 독백이 자그맣게 흘러나왔다. 힘이라곤 조금도 없게 생긴 데다 의욕도 없어 보여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넷이서 대치를 하고 있을 때에는 잘만 느껴지던 마력이 지금은 조금도 탐지가 되지 않는다. 그 나이에 이 정도로 완벽하게 기척을 지울 수 있다니. 제 여동생을 제외하고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또 있을 줄이야. 역시 세상은 넓고 날고 기는 놈들은 많구나. 그럼 둘 중엔 누가 더 강하려나. 그렇게 때아닌 감상에 빠져들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매번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니 아현이한테 욕을 먹는 거겠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결계를 깔면 안경잡이, 네가 더 위험할 텐데. 독 안에 든 쥐잖냐.”
웃음기 섞인 음성에 기대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도망가봤자 제가 잡힐 게 뻔한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답을 하면 위치가 발각된다는 걸 알면서도 순순히 답을 주었다는 건 역시…….
“게다가 이런 돔 안에선 어디에서 말하든 목소리가 중앙으로 모여 울리니……”
“내가 널 찾지 못할 거다?”
“그렇죠.”
“하나하나 알려주고 보기보다 친절하네.”
“알려줘야 아실 거 같아서요. 그리고…… 어차피 제가 이긴 승부기도 하고.”
짤막한 탄성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한눈에 봐도 제 쪽이 훨씬 유리한 상성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런 제약된 공간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배짱에 감탄했다.
“그럼 하나만 묻자. 넌 왜 마법사 쪽이 아닌 날 유인했던 거야?”
“그쪽이 쫓아오신 거잖아요.”
“넌 내가 진짜 멍청이로 보이냐?”
잠시간 침묵이 이어진다. 이 자식 진짜 날 멍청이로 보고 있었군.
“그냥 두면 더 귀찮아질 거 같아서요.”
아까부터 기분 나쁠 정도로 정확한 말만 하네.
“파괴력이라던가 전체적인 전투력 자체는 분명 그 여자 쪽이 더 강해 보이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 그리고 팀 전투의 경우엔 살상력이 높은 쪽이 오히려 더 복병이 될 수 있거든요. 거기다 그 상대가 예측하기 힘든 노련한 살수라면 최대한 빠르게 배제하는 편이 좋겠죠.”
제가 당연히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다는 것처럼. 아니, 그래본 적이 있지 않냐고 확신을 담은 질문과도 같은 어투. 확고에 찬 자기 확신도 저 정도면 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녀석의 말 중 틀린 곳이라곤 조금도 없었기에 그런 핀잔을 줄 수도 없었다. 뭐, 논리적인 이유야 그런 것들이었다만 무엇보다도 몸에 점점 힘이 빠지고 있는 게 문제였다. 짙은 안개에 어떤 수작을 부려놓은 것 같기는 했다만 결계가 진을 치고 있으니 제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기에.
“나한테 관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 난 남자한텐 관심 없는데.”
“뭔 미친……. 기분 나쁜 착각은 그만둬주시죠. 게다가 저쪽은 기껏해야 마법사인 데다…….”
“어려서 만만했다?”
잠깐의 정적.
“뭐…… 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아현이가 들으면 상당히 열받았겠는데. 슬슬 시야가 흐려지는 순간에도 상대의 말은 또렷하기만 한 것으로 보아 저쪽은 이미 해독제를 먹든 어떠한 방도를 마련해 두었던 것 같고. 그렇다면 전투 페이즈에 돌입하기 전에 저를 이곳까지 유인할 생각이었단 건가. 제가 상대해야 할 것이 누구였을 줄 알고? 아니, 그런 의문은 의미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은가. 저런 유형의 인간은 결코 단 하나의 플랜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걸 일 년 동안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건 플랜 C, 혹은 D일지도 모른다. 바로 옆 방 혹은 귀퉁이 너머엔 분명 다른 플랜들이 존재하겠지.
“아……. 이거…… 또 잔소리 좀, 들으……려나.”
중얼거리는 음성마저 길게 늘어진다. 도유진, 정신 차리자. 스스로 되내며 미친 듯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 애쓰며 정신을 다잡으려 했으나 그에 두통만이 물밀듯 밀려온다. 결국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게 되었고 어떻게든 몸에 힘을 실어 검을 지팡이 삼아 최대한 버텨보았지만 결국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곤 금세 바닥에 쓰러졌다. 그 소리에 녀석의 음성이 돔의 정중앙, 제가 있는 곳으로 조용히 닿았다.
“걱정 마세요.”
이렇게 된 이상 잠에 든 척을 한 제게 방심한 녀석이 나타난 틈을 타 그대로 베어버리려 했으나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제 생각은 훤히 꿰뚫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원체 조심성이 많은 성격인 것인지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녀석은 끝까지 오로지 음성으로만 자신을 드러낼 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죽이진 않을 테니.”
#2
끝도 없이 달려들던 마물들. 이렇다 할 강력한 마물은 없는 곳이었다. 수십 년간 미공략된 던전이라고 하기엔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허접스러운 수준의 것들. 그럼에도 정말이지 끝도 없이 소환되는 통에 소모전으로 간다면 제 아무리 강력한 강자라 해도 생존을 보장하기 힘들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더란다. 게다가 던전의 그 규모는 또 얼마나 큰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어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 미로 같은 이곳에서 길을 잃어 아사한 녀석들도 한 트럭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른 공략하고 나가. 나 힘들어.”
울상인 저를 지헌이 힐끗 바라보았다.
“던전이 넓기도 하고…… 미로가 생각보다 복잡해서 예상했던 것보다 지체되긴 하네. 벌써 일주일 째인가.”
그래도 구조를 생각해 봤을 때 분명 곧 최심부일 거야. 징징대는 저를 보면 처음엔 한숨부터 내쉬던 것도 지금엔 익숙한 듯 담담히 답을 내어준다. 그에 툴툴대면서도 곧잘 그를 따라가던 도중 문득 떠오른 의문에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여기 들어오기 전에 문에 쓰여있던 글귀 말이야. 비로소 단 한 사람만이 자격을 얻게 된다. 그거.”
“응.”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해석했어?”
“뭐……. 지금으로선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아마도 딱 한 명만 최심부에 들어갈 수 있다거나 아니면…….”
그의 걸음이 멈춰 선 곳은 거대한 마력을 내뿜는 어느 한 문 앞에서였다. 그가 그것에 압도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의 시선을 따라 그 방의 내부를 바라보면 곧 그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이미 먼저 이곳에 온 낯선 두 인영이 보였다. 아니, 하나는 낯설다고 할 순 없겠지. 놀란 듯하다가 저를 향해 웃어 보이는 그 낯은 기억 속 그대로의 다정함을 내비쳤다. 먼 거리에 서로의 목소리가 닿기는 힘들었으니 이어지는 침묵이 길었다. 걸음을 옮기기에 앞서 그가 말을 마저 잇는다.
“말 그대로 비로소 한 사람만이 이곳에 남았을 때, 문이 열리는 거겠지.”
여태껏 단 한 명도 살아나간 적이 없어 더 이상 도전하는 자가 없다시피 한 던전. 그곳에 우리 둘만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미친 것 아니냐며 제 옆의 녀석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더란다. 완전무장을 한 수많은 모험가들이 완벽한 파티로조차 찾아왔다가 전원 실종 처리된 곳이 아니던가. ─사실상 사망이겠지만─ 단 한 팀도 빠짐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소수로 간다는 기가 찬 대답을 두었더랬지. 단 둘이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으나 언제나와 다름없는 평온하고 담담한 그 어투에 설득당한 나는 결국 이곳에 서있다. 여전히 불안했고 반신반의했지만 그럼에도 그라면 어떻게든 할 것이다. 이는 그를 향한 안일한 믿음임과 동시에 절대적인 신뢰인 셈이다. 모순적이지만 그러했다.
아무튼 그럼에도 그러한 신뢰와는 별개로, 절망의 미로라 불리는 이 악명 높은 곳에 단 둘이서 오는 미친놈들은 저희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겁대가리를 상실한 또 다른 기인이 하나 더 존재했지. 이곳에서 마주칠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패닉에 빠질 것 같으면 바로 전의 상황을 되짚어보고 머리를 비우라던 녀석의 말을 떠올린다. 불과 수분 전의 기억을 되짚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숨을 다듬는다. 녀석은 어떻게든 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질 리는 없어. 그런 생각을 하며 감았던 눈을 느리게 뜬다. 자그마한 미소를 지은 천사 같은 외관. 그런 그녀와 달리 제 낯은 무덤덤하기 그지없다.
“오랜만이네, 언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다.
“아까 보니까 꽤 친해 보이던데……. 의외야. 언니한테 동료가 생길 줄이야.”
“너도 잘 알다시피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지 않잖아.”
“너무 그러지는 마.”
자그맣게 흐르는 웃음소리가 낯익어 그것이 더없이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짜증스러웠다. 그런 저를 훤히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즐겁다는 듯한 그녀의 기색이 더욱 짙어진다.
“그나저나……. 난 오랜만에 만난 언니랑 싸우고 싶지 않은데, 돌아가주면 안 될까? 언니는……. 구태여 이곳에 남을 필요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너도 저 문을 여는 방법을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네.”
턱짓으로 그녀의 뒤에 있는 거대한 또 하나의 문을 가리켰다. 그것을 돌아보지 않고 제게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낯에 변화는 없다.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저를 담은 두 눈은 다정한 빛을 담은 채 입으론 반가워 마지않는 듯한 말을 줄줄 뱉어내고 있었지만, 좀처럼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차분한 시선의 방향은 저를 싸워야 할 대상으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니. 원래부터 만만한 인상으로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것이 수많은 특기 중 하나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에 와선 아주 체득을 한 것 같은 행태에 헛웃음이 샜다.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넌 늘 똑똑했으니까.”
그래. 아마 넌 내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녀석의 논리와 똑같이. 혹은 비슷하게 생각해서 단 둘이서 이곳까지 왔겠지.
“겁먹을 줄 모르고.”
아니, 어쩌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일지도 몰라. 너는 늘 물러나는 법을 몰랐고 그건 네 모든 행동의 원천이 되었으니까.
“유능하고.”
그러니 무모하다고 생각이 들 수 있는 일들조차 너는 결국 해냈어. 매번 일을 그르치거나 어려우면 금방 그만둬버리는 나와 달리.
“늘 사랑받는 방법을 알던 사람.”
같은 부모 아래에 같은 공간에서 자란 너와 나인데, 무엇이 이렇게 서로를 다르게 만들었던 걸까. 어디에서나 예쁨 받는 너와 달리 나는 언제나 문제가 끊이질 않았지. 그래, 알고 있어. 어디에서나 내가 문제였겠지. 그래도 솔직히…….
“부러웠어.”
그래, 이게 진심이야. 그런 네가 내 동생이라 자랑스럽고 기뻤지만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더라고. 그리고 이 진심이 집을 박차고 나오게 된 계기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연달아 사고를 치고 마법 학교에서 낙제점을 받아오자, 그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동생과 저를 비교하며 말실수를 저질렀던 어머니와의 싸움이 문제였지만. 사실 그건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기에.
“생각해 보니까 그런 난 너한테 이겨본 적이 없더라. 언니가 되어선 말이야. 우습지 않아?”
“그건…….”
“아니, 이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거지.”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그 낯을 가만히 응시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난 우리 집에서 늘 천덕꾸러기 신세였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이제는 익숙해.
“나도 너처럼 뭐든지 타고났다면 얘기가 달랐을까.”
넌 어떻게 늘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건지. 봐, 넌 지금 이런 상황에조차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추측조차 가지 않아. 언제나 정확하게 나를 꿰뚫어 보는 너와 달리. 그러니 아마 나는 평생 너를 따라잡을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수없이 해봤어.”
어쩌면 내가 바랐던 건 그저 단 하나였을지도 몰라. 나도 너처럼 사랑받고 싶었어. 단지 그뿐인데.
“그치만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잖아?”
그래, 의미 없다. 나는 나, 너는 너. 그 사람은 온전히 그 사람일 뿐이기에. 그러니까 여기서 나는 오늘 처음으로 널 이겨볼 생각이야. 앞으로도 난 글러먹은 채일 테고 어쩌면 영원히 그러하겠지만, 그럼에도 내 과거의 편린을 향한 작별 인사를 위해. 설령 그것이 아주 작디작은 조각이라고 할지라도.
역수로 쥔 두 단검을 들어 올려 전투태세를 취한다.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인 후에야 그녀의 낯은 드디어 저와 비슷해졌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려던 찰나 다시금 그녀의 얼굴에 미약한 웃음이 번진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어딘가 허탈하고 공허해 보이는 미소. 처음 보는 그 모습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하면 거짓이리라. 그녀가 두 손을 허공에 뻗자 지팡이 한 자루가 그녀의 두 손에 담긴다.
“언니는 정말이지 여전하네.”
그 한 마디가 왜 이토록 아프게 다가왔을까. 타인을 공감할 줄 모르는 제가 갑작스레 각성하여 그녀의 감정에 동화되었을 리는 없다. 그러니 이는 아마 미우니 고우니 해도 가족인 제 친동생이 제게 처음으로 보인 낯짝 때문이었으리라. 괜찮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양 익숙하다는 것처럼 웃는 저 미소 뒤에 희미한 상처가 보였다. 마음 한 구석에 납 한 덩이가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금색빛의 마법진이 갑작스레 그녀의 옆에 생성되더니 그대로 금색 섬광이 저를 꿰뚫기 위해 쏘아졌기 때문이었다.
“남 탓을 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이기심도.”
쉴 틈은 없었다. 저를 비껴간 섬광 한 줄기가 천장을 받치는 기둥 하나를 무너뜨려 그 잔해가 저를 향해 떨어졌다. 그 탓에 그녀가 말하는 것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몸을 낮춘 채 옆으로 굴러 착지하자 제가 서있던 자리에 거대한 돌덩이가 추락해 산산조각 났다.
“방금 뭐라고 했…….”
“다급해지면 오른쪽으로 피하는 습관도.”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하려던 그 순간 그녀가 제 말을 끊었다.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 뒤쪽에 떠오른 마법진. 원래 제가 서있던 곳에선 시야각 때문에 보이지 않아 제가 놓쳤던 마법진이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거구나. 멍하니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은 뒤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마법진으로 인해 역광이 진 채였다. 그리고 그 위에 떠올라있는 건 언제나 제게 보이던 잔잔한 미소. 저토록 자애로운 모습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다니. 이건 뭐 죄인을 단죄하는 천사의 모습이 이러려나.
그 낯에 살의가 없다는 건 명확했으나 저를 적수로조차 인식하지 않는 듯한 오만함 역시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허탈하네. 분하지도 않아서 더더욱.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언니한테 너무 얄짤없네…….”
작은 중얼거림이 끝맺은 후 보다 짙은 빛을 내던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 한줄기가 제게 날아들면 격렬한 격통이 복부로 전해졌다. 어차피 이기지 못한다는 것 정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실망할 것도 없지. 숨이 막힐 듯한 통증에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려 또 한 번 이곳에 왔던 수십 분 전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3
“도망가자.”
진지한 제 목소리에 그는 또 지랄이네 하는 듯한 얼굴로 저를 잠시 보았으나 익숙하다는 듯 결계를 치는 작업을 계속했다. 이미 서로 물러서지 못한다는 의사는 표현했으니 남은 건 전투뿐이라는 걸 안 직후, 지헌은 미리 만들어두었던 마법도구로 주변에 짙은 안개를 만들었다. 제 경우엔 시야가 제약된 곳에서 움직이는 게 비교적 익숙하니 유리한 상황이라 할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방금 아현의 옆에 있던 사내가 어떤 류의 무기를 사용하는지도, 어떤 전투를 하는지도 몰랐기에. 척 보기에도 쉽게 쓰러뜨릴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제 동생 아현이 함께 다니기로 선택한 사내다. 그러니 방심은 금물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난 쟤 이길 자신 없어. 쟤가 얼마나 강한 줄 알아? 내가 집을 떠났던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존나게 강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실전에 다져진 쟤는 얼마나 더 강하겠어? 난 못 이겨. 게다가 걔 옆에 있는 그 맘에 안 들게 생긴 자식에 대한 정보라곤 조금도 없잖아. 아~ 몰라, 몰라. 이기고 자시고 간에 싸우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쟤가 말한 대로 그냥 얌전히 돌아가기만 하면 문제 없…….”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어? 난 아픈 걸 좋아하는 취미는 없거든?”
“……좋아하는 거 같던데.”
“하아?”
왜인지 어딘가 불만스레 중얼거린 녀석에게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의 시선 끝엔 제 초커로 절반 정도 가려진 손 모양의 희미한 멍자국이 걸렸다. 물론 지금의 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고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다시금 눈길을 돌렸다.
초조해진 마음에 손톱을 씹어대자 그 끝이 말랑해질 때즈음, 결계 서너 개 정도를 펼친 그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벽 뒤로 몸을 숨기며 제게 가라는 양 턱짓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은 아마도 제 동생이 있을 그 커다란 방이었다.
“내 말 못 들었어? 난 싸우기 싫…….”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데.”
“그러니까 말했잖아. 쟤…….”
“동생이라서 못 싸우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건 걱정도 안 해. 그게 아니라!”
“그럼 됐어.”
“뭐?”
“니 동생이 얼마나 강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져 온다. 그는 슬슬 유인을 위한 도주를 준비하듯 주변을 살펴보다가 마지막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 언제나 그렇듯 그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절대적인 진실만을 이야기할 때의 그 모습.
흘러내리는 안경을 가볍게 한 손으로 올린 그가 가볍게 입매를 올린다. 건방진 웃음.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오차가 있을 것이라곤 조금도 의심치 않는 오만. 그것은 곧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자신감으로 치환된다.
“나와 있는 넌 최강이야.”
그 한 마디에 제 눈에 서렸던 걱정, 근심, 불안. 그 모든 것들 따위가 깨끗하게 씻겨나간다.
그를 담은 두 눈엔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는 별빛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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