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4. 15:49
#1
“대단하네.”
아현의 마법에 정통으로 맞은 복부에 통증이 심하다. 갈비뼈에 금이라도 간 것인지 잔기침을 뱉을 때마다 폐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공격에 의해 거의 날아가 벽에 처박힌 듯했기에 등에서 오는 격통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 진짜 그만두고 싶네. 그런 생각을 하며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붙잡는 동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간신히 눈을 떠 앞을 바라본다. 여전히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쥔 채 안전거리를 확보한 그 자리 그곳에서 그녀가 저를 바라본다.
“그 짧은 시간에 피해낼 줄은 몰랐는데.”
“그 말은 진짜 죽일 셈이었냐?”
“엄살은. 고작 그런 걸로 죽진 않아.”
고작 이런 거.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말이 허세가 아니란 건 자명한 일일테다.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었던 데다 근거리에서 발사된 마법이었다. 완벽하게 피해내진 못했지만 평소에 몸놀림이 재빠른 저라서 이 정도에서 그쳤던 것이지, 그 공격에 온전히 당했다면 아마 지금쯤 의식은커녕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을 게 뻔했다.
“야! 하나밖에 없는 언니한테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일단 살아야지. ─진짜 죽이진 않겠지만 정말 죽을 만큼 아팠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외치자 맞은 부위가 또 욱신거리며 아파와 인상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와 저와 거리를 좁혔다. 무너진 벽의 잔해 위에 널브러진 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지팡이 끝으로 서서히 저를 조준한다.
“진심이야?”
“잠깐 쉬고 있어. 방해하면 곤란해지니까.”
공격을 하려는 건 아닌 듯 보였고 수면이나 기절 마법의 종류를 걸기 위함인 듯 보였다. 모처럼 맘을 먹었더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다니. 한심해도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나. 아, 그래도 마법 배울 때 좀 열심히 해뒀으면 이렇게 처발리진 않았으려나.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모든 걸 내려두고 수긍하며 눈을 감은 그 순간이었다.
“물러서.”
커다란 굉음 직후 낯익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번뜩 뜬 눈앞에 서있는 건 여전히 그녀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녀의 얼굴은 당혹으로 물든 채였고 어느 새인가부터 제게서 떨어진 지팡이, 그리고 그녀의 앞에 그려진 방어진. 그런 그녀의 시선 끝엔 녀석이 서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낯은 이 역시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처럼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녀석의 지팡이 끝은 그녀를 향한 채였으며 그녀가 그렇게 당황하고 있던 그 찰나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크읏……!”
“그런 무서운 얼굴은 처음 보는데!”
공중에서 그녀를 향해 내리찍은 단도 두 자루를 지팡이로 막아내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방금 전까진 가누기도 힘들었던 몸 구석구석 세포가 하나씩 깨는 듯한 기분. 말 그대로 제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낯이 아니던가.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면 머릿속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대면서도 맑아진다. 피가 도는 감각이 선명했고 전신을 내달리던 고통은 이미 저 뒤로 미뤄진 후다.
급습으로 완벽하지 않았던 마법진이 흔들리면 단도 두 자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그 위로 금을 내 틈을 만든다. 강렬한 빛과 시끄러운 굉음이 웅웅대는 것이 한동안 이어진다. 마법진 위로 한 번 그어진 금은 그 크기가 점차 커져만 간다. 마치 그녀의 낯빛처럼. 그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질수록 제 낯에 번진 웃음은 짙어져만 갔다.
“이제야 볼만한 얼굴을 하고 있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마법진이 산산조각 나고 저는 그대로 단도를 그녀의 어깨 쪽으로 내려찍으려 들었다.
“유감은 없어!”
마법사인 그녀가 근접전에서 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승부는 이미 갈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녀는 다른 흔한 마법사들과는 다른 부류였다는 것이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 늘 이렇게 일처리가 허술하니 매번 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언제쯤 정신을 차릴 것인지.
“……그건 다행이네.”
나직한 그녀의 음성이 울림과 동시에 그녀는 지팡이를 가로로 들어 올려 제 검을 막더니 그대로 지팡이를 돌려 제 팔을 거둬낸다. 이어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제 옆구리를 지팡이 아랫부분으로 가격한다. 부러진 갈비뼈 쪽이었던 터라 미친듯한 격통에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통증에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그녀와 저는 대치하고 선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마도 아까와 다른 그녀의 얼굴 때문이리라. 침착하려 애쓰지만 조급함이 서린 두 눈, 웃음기라곤 온데간데 사라진 낯 그리고 거칠어진 숨을 다듬고 있는 모습.
“체술은 또 언제 익힌 거야?”
“나처럼 어린 데다 예쁘기까지 한 여자애가 혼자 모험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거든.”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는 걸 그녀도 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생각지도 못한 일인 건 둘째치고 군더더기라곤 하나 없는 깔끔한 동작. 분명 그 자식이 알려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냥 그런 감이 들었다.
“어차피 끝난 게임이야.”
그 말에 그녀는 다시 한번 지팡이를 고쳐 잡는다. 준비할 시간을 줄 생각은 없다. 바로 뒤에서 조용히 들려오기 시작하는 언령. 그것을 시작으로 몸이 점차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언제 느껴도 기분 좋은 감각. 중력을 거스르는 듯 발에 땅을 붙이지 않고도 뛸 수 있을 듯한 기분. 나는 다시금 두 자루의 단검을 역수로 쥐어 들었고, 다급해진 그녀는 재빨리 제가 아닌 녀석을 향한 공격 태세를 갖췄다. 열세한 순간에도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다니. 저 정도면 인간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들어진 생명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육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로 그녀를 향해 튕기듯 튀어나가자 제 뒤에 있던 녀석의 머리칼과 로브가 이는 바람에 휘날렸다. 게다가. 덧붙임과 함께 입꼬리가 짙은 호선을 그리면 뾰족한 두 송곳니가 여실히 드러나며 악동 같은. 그리고 한껏 들뜬 웃음이 얼굴 곳곳에 만연한다.
“어딜 보고 있는 거야!”
그녀는 시전하던 마법을 없애고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이미 어깨 한쪽이 제 단검을 스친 감각이 선연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공방. 피해내기 급급한 그녀와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제 일방적인 공격이 수차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게 끝을 맺은 건 그녀가 뒤에 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던 그 순간이었다.
“……운이 좋네.”
정확히 목을 향해 휘둘렀던 단검이 그녀의 뺨에 긴 선을 긋는데서 그쳤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저를 올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와 달리 제 호흡엔 흐트러짐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찰나에 내려앉은 정적을 깬 건 그녀의 음성이었다.
“……유진 오빠가 지진 않았을 텐데요.”
“확실히……. 그대로 대치했다면 내가 졌겠지.”
이쪽을 향해 두어 걸음 다가온 녀석이 순순히 답했다. 그제야 어딘가 분한 듯 이를 악 물고 녀석을 노려보는 그녀의 두 눈은 불꽃이 튀는 듯했다. 내 동생이지만 이럴 땐 무섭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여유롭게 안경까지 벗어 닦아가며 말을 이어갔다.
“난 이래서 목표가 없는 사람을 싫어해.”
저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으나 그녀는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 듯 녀석을 노려보는 강도가 더욱 심해졌다.
“꿈이 없는 사람들은 잠자는 동안 꾸는 꿈만으로도 만족하거든.”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는 그 사내를 보는 순간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부동’ 그것이 그와 잘 어울리는 단어일 것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하더란다. 마법사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자들로, 관찰력이란 건 그들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덕목인셈이다. 그러니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을 간파하는 통찰력을 지닌 건 비단 아현만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 꿈에서 깨려면 조금 오래 걸릴 거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닌가요?”
“아니. 정확하게 보는 것뿐이야.”
유진이 그 자리에 머무르고 원하는 것 하나 없고 그저 그런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건 아현 스스로가 가장 잘 알던 사실이니, 분할지언정 무어라 더 반박하는 건 의미 없는 짓이었다.
“뭐……. 어쩌면 영영 깨지 못할지도 모르지.”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더니 녀석은 저와 서너 발자국 떨어진 뒤에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래, 아직 전투는 끝난 게 아니니까. 마무리는 지어야지.
#2
푸른 언덕에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은 소년이 보인다. 대여섯 살 정도 되었을까. 그 소년을 향해 손을 흔들면 나무에 기대어 그 그늘 아래서 책을 읽던 소년 역시 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다. 나는 언덕 중간 즈음에 서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자주색 양귀비가 빼곡히 수놓아진 드넓은 꽃밭. 나는 이 꽃밭을 좋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싫어하진 않았다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집에서 느끼는 불편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온을 가져다주었기에.
“오빠!”
그렇게 멍하니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제 어깨가 가볍게 툭 밀린다. 뒤를 돌아보면 저를 향해 장난기 서린 다정함을 가득 담은 웃는 낯이 보인다. 아현이다. 언제나 그렇듯 생글대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풀어진 웃음을 머금은 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디 갔다 왔어? 한참 찾았는데. 내 동생……. 그러니까, 강진이랑 만나본 적 없지? 소개시켜줄…….”
“아까 인사했어.”
“엥? 벌써?”
“당연하지. 딱 보니까 오빠가 설명한 그대로던데? 재수 없는 꼬마야.”
마지막 말은 제게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는 아현이었다. 그렇게 설명한 기억은 없는데. 물론 그에 저는 반박하는 대신 그저 자그맣게 웃을 뿐이었지만.
“가자.”
“응.”
이래저래 툴툴대며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어도 결국 저를 따라 소년, 강진을 향해 함께 걸음을 옮기는 제 동생이었다.
“오빠,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
자신의 허리 즈음까지 오는 작은 소년과 신경전을 벌이던 아현이 문득 물어왔다. 멍하니 자줏빛 꽃밭을 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금 그들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결국 그 시선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었다.
“……오빠?”
“뭔가 잊어버린 거 같아서.”
그런 제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저를 불러오는 아현. 그런 아현을 돌아보는 것 대신 그저 꽃을 한참 동안 응시한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 감각을 아까부터 지울 수가 없었다.
“뭘? ……아니다. 잊어버렸다고 했으니 의미 없는 질문이겠네.”
어느새 잠이 든 강진을 무릎에 눕히고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현의 손길이 부드럽다. 이래저래 으르렁대는 견원지간 같아 걱정했지만 결국 어린아이에겐 약한 아현이었다. 제 동생이 다정한 사람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았으니 그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또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저를 힐끗 곁눈질한 아현이 작은 웃음을 머금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잊어버렸으면 어때. 지금으로도 충분하잖아.”
그렇지. 제게 가장 소중한 두 사람과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만큼 만족스러운 생활도 없을 테다.
“오빤 쓸데없이 큰 욕심을 부리는 사람도 아니고.”
던전에 들어오기 전, 제 입으로 한 말이니 이 역시 당연한 말이었다.
“그다지 크게 바라는 것도…….”
“원래 저 색이었던가?”
“응?”
문득 들어온 의문. 아까부터 들어온 괴리감은 아마도 저기서부터 기인된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더란다. 제가 말을 끊자 조금 당황하는 듯도 보였으나 아현 역시 곧 자연스레 제 시선 끝을 따라간다. 짙은 자주색으로 물든 대지. 그 꽃밭을 가만히 응시하던 아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원래 노란색 아니었나……. 꽃 말이야.”
“그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꽤 좋아했거든. 그 꽃밭.”
아, 고향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문득 아현일 데려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 꽃밭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아이 역시 그곳을 꽤 좋아할 것 같아서.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뒤에서 그녀가 무언가 제게 말을 걸어왔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대로 듣기 위해 애쓰는 대신 나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3
“포기할 때를 아는 것도 현자의 미덕이야.”
“어쩌죠. 난 가지고 싶은 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사람이라.”
아무래도 현자가 되기는 그른 모양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 내쉰다. 차라리 공격, 방어 혹은 보조 셋 중 하나에 특화된 마법사였다면 빈틈을 찾아보겠다만. 모든 것을 섭렵한 듯 어떠한 틈도 보이지 않는 사내의 모습에 막다른 곳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언니는 저런 괴물을 어디서 찾아낸 거야. 하여튼 진짜 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라며 약간의 진심이 섞인 짜증이 솟구치던 찰나였다. 발아래에서 붉은 빛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어느 틈에……!”
가까스로 발목이 날아가는 치명상은 피했으나─그런 살상력을 지닌 것 같지도 않았지만─발이 닫는 곳마다 이는 작은 폭발들에 나는 미친 듯이 뛰어야만 했다. 마지막 지뢰를 밟은 직후 그 폭파의 여운에 휘말려 공중에서 한 바퀴 굴러 벽에 날아가 부딪히고 말았지만. 결국 아까 언니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전신에 퍼지는 통증을 느끼며 잔기침만 연신 뱉어댔다. 미처 온전히 피하지 못한 탓에 여기저기 베여 찢어진 채 피로 물든 옷. 게다가 잔뜩 구른 탓에 엉망진창이 된 참이니 제 몰골이 얼마나 처참할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뺨에서 따뜻한 감촉이 들어 소매로 닦아내자 멎은 줄 알았던 피가 묻어났다. 상처가 그새 또 벌어진 모양이다.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고 다시금 몸을 일으키자 비틀대며 넘어질 뻔했으나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선다.
“승부는 정해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잔인한 사냥법을 즐기시네요.”
“과한 비약이야. 예상하지 못한 쪽이 뻔한 인간인 거지.”
“재수 없단 소리 많이 들으시죠?”
“뭐……. 어쩔 수 없지.”
한 손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는 사내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이지 더도 말고 딱 한 대만 주먹으로 세게 갈겨주고 싶었다.
“……아직도 싸울 생각이야?”
“끝까지 싸울 생각이에요.”
다시금 지팡이를 생성해 두 손으로 잡는다. 그가 조금은 질렸다는 낯빛을 지어 보였으나 또 그게 그리 싫어 보이진 않는 건 비단 제 착각만은 아니리라. 그래, 그 변태 같은 취향 하나만큼은 질릴 정도로 공감할 수 있겠네.
공중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금색 섬광이 그를 향해 빗발친다. 그 역시 지지 않고 붉은 마법을 그려내 그것들을 하나하나 격추시켜 나간다. 뭐,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상관없지. 이건 그저 눈가리개 용도일 뿐, 나는 재빨리 주변을 스캔하며 제 언니의 마력을 탐지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암살자는 언제라도 경계 대상 1순위였으니. 하지만 아까부터 감쪽 같이 사라진 마력은 좀처럼 감지되질 않았으니 점차 초조해질 수밖에.
“타인의 마력을 감춰주는 마법에 대해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너…… 네 언니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그런 적 없어요.”
“그러냐.”
마법끼리 맞부딪히며 굉음을 일으키고 크고 작은 파열을 그려내며 끝없이 폭발한다. 대단하네. 그 소란 속에서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마법을 시전하는 중에도 마력 탐지를 계속해서 이어나간다는 건 상식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그가 그런 말을 할 만도 하지. 허나 감사 인사는 후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경계를 늦추는 순간, 그것이 바로 이 싸움의 종지부였으니. 그런 저를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연다.
“그 녀석은 말이지…….”
“읏……!”
나직한 중얼거림과 달리 출력이 강해진 그의 공격에 저 역시 보다 더한 힘을 마법 시전에 집중한다. 노랗고 붉은 빛들의 격돌. 화려한 불꽃처럼 터져대는 격렬한 교전 속에서 그와 저는 단 한순간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순간, 안경 너머로 그의 황동색의 눈이 반짝이면 그 입꼬리가 뒤틀린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해.”
설마. 그런 생각이 든 순간은 이미 늦은 것이다.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자 공중에 보이는 낯익은 인영. 신이 난 듯 개구진 웃음 위로 보이는 뾰족한 송곳니 한 쌍, 즐거운 걸 볼 때마다 별처럼 반짝이던 두 눈. 양갈래로 묶은 머리칼이 마법의 파장에 휘날리며 공중에 나부낀다. 두 발아래에 있는 붉은 마법진. 저를 향해 치켜든 두 자루의 단검에는 분홍색 마력이 응축된 채 날카롭게 번뜩인다.
“말도 안 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력을 감추는 건 하루이틀 만에 체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니,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급히 그녀를 향해 지팡이를 돌리려던 그때였다. 붉은 마법진이 그의 뒤로 몇 개 더 생성되더니 아까보다도 강력한 힘으로 저를 밀어붙여 제 손발을 잡더니, 곧 수분 전 들었던 언령이 다시금 들려온다. 노련한 마법사라면 두 가지 마법 정도야 동시에 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능숙한 자들에 한정된 이야기다. 제 나이 또래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경지의 수준일 텐데.
이를 악 문 채 짧게 그를 노려보면 언령을 멈추지 않은 채 그는 입매를 씩 당긴다. 마치 천재라 불리는 건 너만이 아니라고 말해주기라도 하듯 말이다. 아, 진짜 한 대만 때려주고 싶네.
“또 어디를 보는 거야.”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빠르다. 이미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단검이 저를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아…….”
“네 상대는 여기라니까!”
고양된 그녀의 음성, 별을 박아 넣은 듯 마법보다 반짝이는 두 눈동자. 저런 얼굴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나. 언니를 이렇게 만든 건 분명 저 사람일 테지.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을 했더란다.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이거 집단 괴롭힘 아닌가. 진짜 치사하네.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며 헛웃음을 터뜨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못 피하지…….”
처음으로 느끼는 패배의 감각. 고작 두 사람을 상대로 지다니. 게다가 또래를 상대로 말이다. 이 나이에 이 정도면 생각보다 꽤 많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을지도. 뭐, 지금 후회해봤자 의미 없나. 그렇게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날붙이가 서로 맞부딪히는 소음이 제 귀를 찢을 듯 울리며 시야가 암전되었다.
“자면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아니, 그게 아니다. 낯익은 검은색 망토가 휘날리며 제 시야를 가렸다가 다시금 가라앉는다.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제 앞에 선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지헌의 표정은 당황으로 물든 채였으며, 아리는 불쾌감으로 얼굴을 잔뜩 구긴 채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대답…… 지금도 바꿀 수 있나?”
유진, 그가 여기까지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을 테니. 심지어 저 역시도 말이다. 언제나 제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다 못해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 서로 좀처럼 물러서지 않고 단검과 검을 맞댄 채 서슬 퍼런 파열광을 튀겨대고 있는 주제에 멋쩍은 듯 물어오는 꼴까지. 정말이지 이해하려야 이해를 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순간 대답할 말조차 찾지 못해 그저 그대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보고 싶은 게 생겼어.”
결국 힘 겨루기에서 진 아리가 튕겨나가듯 공중에서 뒤로 한 바퀴 돌곤 땅으로 사뿐히 착지했다. 그 후에도 유진은 상대를 경계하듯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소란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자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네가 날아오르는 모습.”
“그게 무슨…….”
그 순간 제 머릿속을 스쳐가는 그날 밤. 모닥불 앞에서 나눴던 대화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상대 역시 당장 전투를 속개할 맘이 없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에야 그는 느릿하게 뒤돌아 저를 바라보았다. 가볍게 올린 칼로 본인의 어깨 견갑을 툭툭 두드리는 껄렁한 자세하며 삐딱하게 기운 고개까지. 언제나 그렇듯 진지한 기색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아현이 넌 네가 원하는 만큼 높이 올라가 봐.”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시원스레 입매를 올리면 커다란 손 하나가 제 머리 위로 툭 떨어진다. 투박하지만 이젠 제법 익숙한 손길.
“네가 원하는 거라면 이 오빠가 전부 들어줄 테니.”
꽤 오래. 한참을 넋을 뺀 채 그를 바라보았던 것 같다. 정말이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오랜 침묵을 깨뜨린 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헛웃음이었다. 하지만 이전 것과 다른 그것은 기분 좋은 울림으로 번져갔고 그렇게 몇 초 간 웃은 후 나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잡아내려 제 볼을 비비적댔다. 마치 제 것에 흔적을 남기는 듯한 이 행위 역시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온기가 몸 구석구석 퍼져 만족스러울 때까지.
“이전엔 몰랐는데……. 엄청 든든하네.”
“그럼~ 네 하나밖에 없는 오빠잖냐.”
능청스러운 대답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 제 모습에 안심한 듯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거는 그.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잠시 웃다가 다시금 제 앞의 상대를 향해 돌아섰다.
생사를 함께 한 지 어언 일 년이다. 서로가 어느 순간에 뭘 해야 하는지 정돈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느릿하게 검을 아래로 내려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나는 그런 그의 두어 발자국 뒤에서 지팡이를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승부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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