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22. 13:36
“안녕, 아야짱. 언니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햇살 만큼 도담한 낯이 온화하고 그 이상으로 다정한 음성이 흩어지는 것 하나 없이 선명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제법 다른 남자의 모습에 빠르게 휙휙 돌아가며 상황을 파악하는 제 시선의 모양새가 제법 우스웠을지도. 내가 남자에게 느꼈던 첫인상을 한 마디로 함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꽤 반반한 멍청이, 그저 헤실대기만 하는 모습에서 중압감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으니 미련 없이 시선을 옮겨 제 언니에게로 두었다.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 그럼에도 별 박힌 파란 눈이 한 곳에 고정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상황을 꽤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후에야 느리게 손을 뻗어 제 앞에 있는 커피잔에 손을 대자 자기 안에 블랙커피가 넘실댔다. 들어 올린 그것을 한 모금 넘기면 시럽 한 방울, 설탕 한 스푼 넣지 않은 쓰디쓴 맛이 혀 끝에 닿아 익숙했다.
“저야말로요. 서율씨……. 아니,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남자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다정한 음색이 언제나와 같아 산뜻하기만 했다. 한 치의 예상도 빗겨나가지 않는 밝은 대답이 공간을 메우면 작게 웃는 낯을 한 채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자그마한 파문과 함께 이어지는 찰나의 정적이 되레 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대화들은 시답잖은 내용들 뿐이라 이제 와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듣고 있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뻔한 자기소개가 끝나면 평소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 학교 공부는 어떤지 한국에서는 잘 지낼만한지. 애정을 기반에 둔 관심 서린 질문들이 제게로 향했다. 그 짙은 호의에 응하는 미소는 여실하나 그와 반대로 마음 한 구석이 아래로 죽죽 잡아끌어지는 느낌만이 또렷했다. 언제까지 이 거짓 놀음을 이어나가야 하는 건지. 슬슬 입꼬리에 경련이 일 무렵, 낯선 음악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 잠시 전화 좀. ……네, 피디님! 아, 벨소리 바꿨네. 피디는 또 뭐야. 누구길래 처음 보는 얼굴로 신이 나서 뛰어가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멀어지는 언니의 모습을 보고 있던 그때 다시 한번 남자가 제게 말을 건넸다. 한들대는 웃음 하며 선의를 잔뜩 머금은 음성으로 또 한 번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 수분 간 이어졌다.
“아리쨩이 그러는데 그래서 그때 아야짱이…….”
“언니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웃는 낯이 여상한데도 남자의 얼굴에 당혹이 번지는 건 비단 그의 말을 차갑게 끊어냈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제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 듣더라도 명백한 적의가 서린 음성이 나긋했으니.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잠시 말문을 잃은 듯 저를 멍하니 응시했던가. 이제 와선 별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지만. 그는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 좋지. 응, 많이 좋아해. 좋은 사람이잖아. 그러니 아야짱도 언니를 많이 아껴주는거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 말고도 아리쨩한테 이런 존재가 있어왔다는 사실에.”
“오빠는 꽤 자랑스러운 아들이시겠어요.”
“응? 아……. 뭐…….”
사랑받고 살았나 보네. 남자의 말이 끝난 직후 들었던 생각이었다. 확실히 제 언니가 여태껏 만나왔던 글러먹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 아니,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제 혀끝에 스민 칼날에 살갗을 스쳐놓고도 저렇게 속없이 웃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띤 미소가 묘하게 어긋나면 남자가 또 한 번 제 눈치를 슬 살폈다. 표정을 보아하니 또 귀찮은 이야기나 늘어놓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더란다.
“아…….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아리한테 신경 못쓰는 부분들도 많을 테니까 아야짱이 있으면 든든하단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물론 나도 아야가 한국에 있는 동안엔 아야한테 신경을 많이 쓸 거고. 나는 아야짱이 맘에 들…….”
“선 넘지 말아 주실래요.”
여전히 상냥한 투에 때 이른 서리가 앉았다. 누가 누구한테 신경을 쓴다는 건지. 헛웃음이 입 밖으로 이는 것을 미처 참지 못했으나 멋쩍지만 선명한 남자의 미소는 선하기만 했다. 내가 선을 넘었나? 입매에 새긴 호선이 짙은 그 낯이 제 것과 상이해 이질감이 일었다. 음, 그렇지. 아야쨩은 가족이고 나는 남이니까~ 그럴지도. 부드러운 미성이 자꾸만 제 안을 억지로 잡아여는 듯한 감각이 거북해 구역감을 참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난 형제가 없어서. 상냥하기 그지없는 애정은 제 언니 뿐만이 아니라 저마저도 품겠다는 양 맘껏 구는 작태였다. 비틀어져 올라가는 입맵시만큼이나 심사가 뒤틀리는 감각은 도저히 참으래야 참을 수 없는 것이라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저를 올려다보던 남자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뻔했기에 일말의 시선조차 던지지 않고 지갑을 꺼냈다. 오만 원 권 한 장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지면 흐르는 음성이 채 무엇도 담지 않은 흑빛인 듯했다.
“커피는 제가 살게요, 서율씨.”
남자가 뭐라고 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명확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당혹스러운 음색이 짙었으며 저를 잡으려 했던 손이 저로 인해 차갑게 쳐내진 채 허공에 오래 머물러있던 장면이 망막 위로 언뜻 새겨진 듯도 했다. 그때 제가 뭐라고 했더라. 역겨운 오빠 노릇 집어치워. 였던가.
상처받았을까. 언뜻 그런 생각이 지나갔지만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는다. 따뜻한 품이 이젠 한없이 익숙하기만 하다. 사내의 무릎 위에 앉아 그 어깨에 뺨을 기댄 모습이 무기력하다. 축 늘어진 두 팔 하며 느릿하게 감겼다가 뜨이기만 반복하는 두 눈에 초점이 흐리다. 귀를 가져다 댄 것이 사내의 왼쪽 어깨라 피부 아래로 간간이 들려오는 심장의 고동이 규칙적이다. 그 흔한 시계 하나 없는 텅 빈 거실 소파 위에 서로 겹쳐 앉은 둘. 흰색 패브릭 소파 위로 올라간 사내의 손을 간간이 만지작댄다. 별 의미 없는 그 행동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양 담담기만 하다. 얼마나 오랜 침묵이 이어졌던가. 적어도 수분은 된 듯한 건 착각이 아니기에 한참 눈치만 살피던 사내가 먼저 말문을 연다.
“오늘 언니 만난다고…….”
“……아무 말도 말랬잖아.”
힘없이 고요한 음성에 사내가 다시 함구하면 잿빛 눈동자가 제 상태를 살피듯 이리저리 구른다. 그 불안 서린 낯을 본 것도 아니었지만 여태 그를 겪어온 것이 있으니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기에 느리게 한 손을 들어 올린다. 여전히 사내에게 제 머리를 기댄 채 한 손으로는 그의 턱과 뺨을 가볍게 쥐고 그 입 위로 검지를 얹는다.
원래부터 제 것이 아니었음을 안다. 제 언니란 작자에게 있어서 1순위는 늘 제가 되지 못했다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텐데 왜 이렇게 허무한 거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땐 늘 제게 찾아와 조언을 구했고 슬프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땐 언제나 제게 먼저 이야길 했더랬지. 분명 그랬을 텐데 제겐 그저 생경하기만 했던 벨소리와 통화 내용, 그 외의 것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리고 그 일련의 모든 것들을 익숙한 것 대하듯 넘겼던 남자의 낯 또한 무의식 귀퉁이 어디 즈음에 닿았다 사라진다. 그런 후에 찾아오는 건 일종의 허기다.
모래알이 전부 빠져나간 빈 손에 닿는 말캉한 감촉과 온기가 선명해 괜스레 손아귀에 힘을 실으면 곤란한 듯 앓는 소리가 귓가에 선연하다. 그 침음이 들린 후에야 상체를 꼿꼿하게 펴 그를 가만히 응시하는 두 눈에 묘한 일렁임이 인다. 사내의 얼굴에 올라가 있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걷어내자 온전한 낯이 드러난다. 그 모습 구석구석 전부를 씹어먹기라도 하려는 양 사내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푸른 눈빛이 묘한 공허감으로 드글대면. 배고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사내와 숨결을 겹친다. 평소와 다른 조급함이 잔뜩 서린 행위에 붉은 살덩이를 거칠게 머금으면 사내는 그에 맞춰주기라도 하듯 저를 위해 순순히 한 발 물러선다.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몸에 힘을 뺀 그가 하는 것이라곤 간간이 제게 맞춰 입술을 여닫을 뿐. 이러한 행동이, 이러한 애정이 제겐 기폭제가 된다는 걸 이제는 그도 알고 있을 텐데. 참으로 얄궂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단 생각을 하면서도 또 그게 맘에 드는 건 하릴없는 것이다. 말캉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기도 하고 달콤하게 취한 채 부족할 틈 한 번 없이 그를 물어뜯는 행태가 탐욕스럽기 그지없다. 숨 한 점 없는 격렬한 키스는 더 이상 애정행각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인 것이라 마치 제가 그를 전부 집어삼키려는 양 보였을지도 모른다. 부족해. 열기를 잔뜩 머금은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평소와 달리 여유라곤 없는 손길이 사내의 복부를 급하게 타고 오른다.
“……오빠, 하자.”
하고 싶어졌어. 끝을 맺는 나직한 속삭임엔 끝없는 갈증이 서린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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